파란만장 커피사 - 커피와 음악(하)
20세기 인스턴트커피 확산과
대중음악 폭발적 성장 맞물리며
'커피' 들어간 노래들도 유행
1939년 이난영 선생 ‘다방의 푸른 꿈’
일제강점기 속 겨레의 고뇌 배어 있어
세계적인 팝가수 빌리 조엘
“커피잔 속에 위안 있다” 노래하기도
20세기에 커피와 음악 분야에서 벌어진 공통된 현상으로 ‘대중화’를 꼽을 만하다. 귀족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던 커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샐러리맨의 아침 식탁에 오르는 생필품이 됐다. 전쟁 속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발명돼 확산된 덕분이다. 음악 분야에서는 라디오와 음반 등의 매체가 확산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목적의 대중음악(popular music)이 급성장했다. 바야흐로 커피와 음악은 대중의 취향을 상징하는 코드가 됐다. 뮤지션들은 커피를 노래로 은유했고, 커피는 휘발되기 쉬운 대중음악에 묵직한 의미가 돼 주었다.
19세기 말 남북전쟁 이후 노예해방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의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목화밭이나 사탕수수 또는 커피밭에서 혹독한 일을 견디기 위해 불렀던 흑인들의 노동요는 이제 도시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공장지대로 옮겨간 흑인들은 주말 밤에는 작은 선술집에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 전쟁 통에 남겨진 군악대 악기들을 흑인들이 즉흥 연주에 활용하면서 뉴올리언스에서는 재즈가 태동했다.
1913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흑인 취향의 재즈와 블루스를 보다 체계화하고 일반화하는 계기가 됐다. 입대했던 흑인들이 군대에서 악보를 해석하고 팀을 이뤄 연주하는 경험을 쌓으면서 영가(Gospel song), 래그타임(Ragtime) 등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이 인종을 초월해 사랑받는 대중음악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인스턴트커피의 확산 덕분에 커피를 저렴하게 마실 수 있게 되면서 대중음악에 커피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커피는 신분과 진영, 이데올로기를 떠나 누구나 즐기는 ‘만인의 음료’가 되었고 노래의 소재로도 사랑받았다.
뉴욕 대중가요와 커피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노래 가운데 커피를 소재로 한 초창기 곡으로는 1925년 조셉 마이어가 작곡한 ‘커피 한잔과 샌드위치, 그리고 당신(A cup of coffee, a sandwich and you)’이 꼽힌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다소 코믹하게 터치한 이 곡에서 커피 한잔은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소박한 장소를 낭만적으로 꾸며주는 오브제가 된다.
레이 헨더슨이 1928년 발표한 ‘내 커피의 크림과 같은 당신(You’re the cream in my coffee)’은 냇 킹 콜과 막스 라베 등 유명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널리 퍼진 덕분에 지금까지도 영화나 공연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멜로디가 됐다. 이 곡의 노랫말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크림과 설탕이 커피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는 멋진 비유가 들어 있다.
이어 1930년대와 1940년대 뉴욕에서는 ‘또 한잔의 커피를 마시자(Let’s have another cup of coffee)’ ‘커피 노래(The Coffee Song)’ 등 커피가 들어간 노래들이 유행했다. 이 시기의 노랫말을 살펴보면 커피가 사랑 고백과 같은 정서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에서 행복을 선사하는 음료로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커피 광고에 애용돼 요즘 커피애호가들에게도 익숙한 잉크 스팟스 밴드의 ‘자바 자이브(Java Jive)’는 노래가 발표된 1940년 카페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포착해 표현한 것이다. 자바는 당시 맛이 좋은 커피로 대접받은 인도네시아 커피 산지를, 자이브는 ‘흥겨움’ 또는 ‘경쾌한 춤’을 뜻한다. ‘멋진 머그잔으로부터 나에게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커피 한 모금(Slip me a slug from the wonderful mug)’이라는 가사에서 보듯 커피 음용 자체에 대한 묘사가 섬세해졌다.
이난영과 블루지 커피(bluesy coffee)
커피로 멋을 부리던 음료 문화가 뉴욕을 적시던 시절, 조선 땅에도 블루스풍의 커피 노래가 나왔다. 1939년 이난영 선생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에는 일제강점기를 겪는 겨레의 고뇌가 배어 있다.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고요한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부르누나, 부르누나/흘러간 꿈 찾을 길 없어...>
1930년대 후반은 일제의 수탈이 극을 향해 치닫던 시기였다. 일제의 폭정 속에서 가난을 비관한 청춘들이 투신자살하고, 만주에서는 항일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소식이 이어졌다. 마음이 무거운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다방 한구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울분을 달래야 했다. 시대를 반영한 우리의 커피 노래는 이처럼 1930년대 끝 무렵에 나타났다.
현대 대중가요와 커피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근대가 저물고 현대적 문화와 정신이 싹트면서 커피를 소재로 한 노래들은 헤아릴 수 없이 급증했다. 커피 노래는 코믹과 정서를 달래는 ‘심리적 도구’라는 쓰임에 ‘풍자’를 장착하고 더욱 다양한 메시지를 담게 됐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1946년 노래한 ‘커피송(The Coffee Song)’에는 정치인의 딸이 물을 마시다가 벌금을 물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브라질의 커피 과잉생산을 풍자한 것이다. 이 시기에 커피가 과다하게 생산되는 바람에 증기기관차의 땔감으로 커피 생두를 사용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2인조 여성그룹 펄 시스터스(배인순, 배인숙)가 1968년 발표한 ‘커피 한잔’이 현대 가요의 시대를 열었다. 신중현이 1964년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원래 제목이 ‘내 속을 태우는구려’였으나, 김추자가 1970년에 ‘커피 한잔(A Cup of Coffee)’으로 리메이크했다. 1991년에는 탤런트 김혜선이 모델로 등장한 롯데제과의 떠먹는 아이스크림 ‘커피한잔’ 광고에도 사용됐다. 같은 해 신해철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는데 랩이 추가됐으며, 노래의 느낌도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몽환적이다.
빌리 조엘과 커피의 위안
노랫말 중 커피에 관한 가장 멋진 은유로 손꼽히는 표현은 ‘내 커피잔 속에 위안이 있다(There’s comfort in my coffee cup)’이다. 빌리 조엘이 1993년 발표한 ‘페이머스 라스트 워즈(Famous Last Words)’에 나오는 가사이다. 곡목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그가 유언을 담겼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때 자살까지 시도하려 했던 그가 그래미상 6회 수상, 음반판매 1억 장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삶으로 반전을 이룬 데는 커피가 있었다. 그에게 실제로 커피가 위안이 됐던 것이다. 그는 1995년 독일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객석의 팬에게서 “Famous Last Words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조엘은 1939년작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 제목의 영감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우리에게는 이 영화의 명대사로 비비안 리(스칼렛 오하라 역)가 한 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가 유명하다.
하지만 미국인에게는 레트 버틀러의 대사가 더 유명한데,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오(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라는 대사다. 이 표현은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영화 명대사 톱 10 가운데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스칼렛의 변덕에 염증이 난 레트가 마침내 굴레를 벗어나 그녀를 떠난 새로운 삶을 산다는 의미를 담은 대사다. 조엘은 레트의 결단처럼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비장한 마음을 유언을 떠올리게 하는 ‘Famous Last Words’로 표현한 것이다.
커피는 대중음악에서 수많은 은유의 도구로 활용되는 사례를 거치면서 문학적 수사의 영역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커피는 노래를 통해 소리와 가락을 빼고, 단어 자체만으로도 정서와 정신을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1
2
3
4
5
6
7
8
9
10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