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낭패의 역사를 기억하는 길, 낭만의 이름으로 덮어질까…

입력 2025. 07. 24   16:09
업데이트 2025. 07. 2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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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왕의 길’, 아관파천 길

명성왕후 시해 후 신변 위협 느낀 고종
친러파 종용에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
일본·러시아 세력 다툼에 휘둘린 조선
환궁했을 땐 이미 열강들에 국권 침탈
국제정세 어두웠던 군주의 ‘오판의 길’
왕이 지나갔다는 의미만 부각 씁쓸해

덕수궁 북쪽에 ‘왕의 길’이라는 게 있다. 덕수궁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50m 남짓한 길이다. 이 길을 고종이 가마 타고 갔다 해서 후세가 붙인 이름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정부를 옮겨갔다가 1년 후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가마 타고 통과한 길이다. 구보는 이 길의 푯말을 대할 때마다 무능한 왕의 행적이었지만, 낭만적으로 묘사하려는 후세의 마음이 엿보여 안쓰러움을 느끼곤 한다.

 

옛 러시아 공사관. 6·25전쟁 때 소실되고 첨탑만이 남아 있다. 필자 제공
옛 러시아 공사관. 6·25전쟁 때 소실되고 첨탑만이 남아 있다. 필자 제공



러시아 공사관은 정동의 언덕 위에 자리잡았다. 경복궁과 경운궁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였다. 러시아인 사바친이 설계한 르네상스풍 2층 벽돌 건물은 다른 서구 열강의 대사관보다 컸다. 지하와 지상에 걸친 구조여서 짓는 데 5년이나 걸려 1890년 완공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건물 공사관이었다. 1925년부터 1950년까지는 소비에트연방 영사관이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지금은 첨탑만 남아 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연방이 수립되자 러시아는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새로 터를 잡으려 했으나 이미 대지의 대부분이 일반에 매각된 상태여서 조금 떨어진 배재고등학교 옆에 새 대사관을 지었다. 구 러시아 공사관은 러시아 관광객들이 서울에 오면 꼭 찾는 자국 유적지다. 이 공사관은 고종이 정부 기능을 이곳으로 옮기는 파천(播遷)을 단행함으로써 우리 근대사에 족적을 남겼다. 아관파천이다. 아관(俄館)은 당시 러시아를 음차한 ‘아라사(俄羅斯)’에서 비롯했다.

1895년 8월 명성왕후가 왕과 거주하던 궁궐 경복궁에서 학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됐다.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려 들었다.

1895년 12월 친러파인 농상공부협판 이범진이 주도해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려 ‘춘생문(春生門)’ 파천을 시도했으나 낌새를 눈치채고 지켜보던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실패했다. 이범진은 즉시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1896년 초 귀국해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그 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짜고 고종에게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다시 종용했다.

 

‘왕의 길’. 고종이 아관파천했던 길이다. 필자 제공
‘왕의 길’. 고종이 아관파천했던 길이다. 필자 제공



고종도 왕실의 안전을 우려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함으로써 1896년 2월 11일 아침 7시30분, 왕과 왕세자, 궁녀가 두 대의 가마에 나눠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물샐틈없는 감시 속에서 궁녀들과 장교 이기동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했다(『내가 본 조선, 조선인』, 러시아 육군대령 카르네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친일 개화 내각의 대신들이 친러 내각의 제거 표적이 됐다. 친일 내각의 총리대신이던 김홍집은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순검과 국왕 지지자인 보부상들에게 둘러싸이자 “일본 수비대로 피신하라”는 일본 군인들의 권고를 받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명색이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떳떳한 천명이거니와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해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만 같지 못하리라”(『매천야록』)라고 분연히 말하고선 살기등등한 보부상패에게 구타당해 죽었다. 한 나라 총리대신의 최후치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각료는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됐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됐다.

 

1900년 무렵 서울 정동에 자라잡은 러시아 공사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00년 무렵 서울 정동에 자라잡은 러시아 공사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구보는 당시 고종의 친일 내각 제거는 명성왕후 시해에 대한 반일감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풀이한다. 『고종실록』에는 고종이 왕비를 잃은 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세자와 함께 대신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궁에서 여러 차례 위령제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승정원 승지와 함흥부 안핵사를 지낸 후 관직을 떠나 강화도 처소 명미당에 칩거하고 있던 이건창(1852~1898)도 파천 석 달 후인 1896년 5월 14일 올린 상소문에서 “국왕이 다른 나라 공관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을미사변 때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왕의 심정에 공감을 표했다.

조선에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 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이 대거 등용돼 내각을 구성했다. 박정양·이완용 등의 친러 내각은 내각을 의정부로 환원해 한동안 약화된 전제왕권을 다시 강화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높아져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됐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 세력 다툼의 결과였다. 일본은 군대 주둔 허용을 조건으로 내걸며 러시아의 영향력 발휘를 승인했다.

구보는 왕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 탓에 단행한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이 얻은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군국기무처에 행정을 맡기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던 1894년의 갑오개혁은 실종돼버렸고,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미국·일본·프랑스 등 열강은 왕의 보호 대가로 철도 부설권과 금광 채굴권·저탄소 설치·삼림 채권·전기 부설권 등을 챙겼다(『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이배용).

아관파천은 러시아의 남하와 동진을 저지하던 대영제국의 대외정책과 배치되면서 세계 최강의 눈 밖에 나버렸다. 영국이 1882년 수교 때 극동에서의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 거문도 조차를 제의한 바 있다. 러시아가 함남 영흥만을 차지해 부동항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885년 4월부터 2년간 거문도를 점령해 군대를 주둔시킨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고종의 국제정치 감각이 그토록 부족했다는 데 구보는 놀란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승인받는다. 6년 전 조선 국왕이 보인 친러시아 태도, 아관파천이 야기한 엄중한 결과였다. ‘왕의 길’을 대할 때마다 구보가 한숨을 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국제정세에 어두운 암군이 우매한 결행을 한 길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표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굳이 표지판을 내걸고 싶다면 사실대로 ‘아관파천 길’이라고 쓰는 게 옳다고 여긴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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