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 명예롭도다(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젊은이들에게 전투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로마의 더 위대한 큰 영광을 위해서(Ad maiorem Romae gloriam: For the greater glory of Rome)’란 구호는 중세 십자군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하느님의 더 위대한 영광을 위해서(Ad maiorem Dei gloriam: For the greater glory of God)’다. 고대와 중세까지 전쟁의 명분은 신이나 신을 대리하는 절대권력을 위해서였다.
근대 들어서면서 전쟁의 명분은 대중이 추구하는 이념으로 바뀌었다. 프랑스혁명에서 혁명군은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고,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앞두고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고 부르짖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군은 ‘우리 권리를 지키자(Protect Our Rights)’, 북군은 ‘연방을 지키자(Preserve the Union)’고 했다.
20세기 들어 전쟁의 명분은 국가로 바뀌었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주체로 국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조국은 네가 필요하다(Your Country Needs You)’고 호소했고, 미국은 ‘너를 원한다(I Want You for U.S. Army)’며 포스터를 보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소련은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For the Motherland, For Stalin!)’ 싸우라고 재촉했다.
정보가 빛의 속도로 퍼지는 21세기다. 신, 이념, 이데올로기, 조국 같은 모병(募兵) 키워드가 얼마나 먹힐까? 정보를 더 빨리 획득하고 퍼뜨리는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모는 데 이런 추상적 구호가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중국처럼 정보가 극단적으로 차단된 권위주의 국가나 이란처럼 절대적인 신권(神權)을 강조하는 국가가 아니라면 젊은 장병을 전쟁터로 유인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치열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그동안 젊은이에게 강조해 온 ‘애국의 의무’가 바닥난 듯하다. 전쟁 초기부터 용병에 의존했고, 가난한 청년에게 거금을 약속하거나 죄수에게 면죄를 보장하면서 부족한 장병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으고 있다. 오죽하면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있는 북한군까지 끌어들였을까? 미국과 서방에 전적으로 기대는 우크라이나는 훨씬 절박하다. 조국을 향한 애국심과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부르짖는 방법 외에는 다른 명분이 없어 보인다.
끈질긴 생존 투쟁 끝에 터득한 전략일 터. 하마스에 이어 헤즈볼라와 이란으로 전선을 넓히는 이스라엘은 전쟁의 명분을 내세우는 작전에서 훨씬 현명해 보인다. 영토 방어와 국민 생존을 위한다는 따분한 모병 슬로건보다 대중에게 파고드는 소통에서 더 큰 대의명분을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We did not want this war)’.
북한 정권은 최근 러시아와 맺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핑계로 이역만리 우크라이나 전선까지 1만 명이 넘는 젊은 장병을 파병한 것으로 보인다. 강퍅한 북한 정권은 그 많은 장병에게 무슨 명분을 내세우고 어떤 보상을 약속했을까? ‘왜소한’ 장병을 움직인 건 그 명분과 보상이었을까, 아니면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을까?
정작 궁금한 건 우리 쪽이다. 우리는 혹시라도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 어떤 소통전략을 세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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