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파란만장 커피사

커피는 손맛? 믿다간 쓴맛!

입력 2023. 06. 05   17:43
업데이트 2023. 06. 0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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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추출

‘손기술이 맛 결정’은 그릇된 신념
같은 커피로 매번 같은 맛 내려면
원두와 물의 양·시간 정확히 재야
감각도 변수…커피 자체에 집중을



“커피를 잘 추출해야 맛있다”는 말이 ‘손기술에 따라 맛이 좌우된다’는 뜻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커피의 맛은 원재료인 생두 선택에서 이미 갈린다. 덜 익거나 벌레 먹은 열매에서 나온 커피, 묵거나 상한 커피를 맛 좋게 만들 수는 없다. 로스팅과 추출방식에 따라 맛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지, 애초 커피에 들어 있지 않은 맛을 만들어낼 순 없다. 인간의 손은 단지 하늘이 커피 씨앗에 담아 준 성분을 맛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좋은 커피의 맛을 즐기려면 신선하고 성분이 풍성하게 들어 있는 생두를 애초에 잘 골라야 한다. 이어지는 로스팅은 덜 익거나 타지 않도록 적절한 범위를 일관성 있게 반복할 줄 아는 것으로 족하다.

커피 추출(Coffee Extraction)도 마찬가지다. 성분이 과다하게 나오거나 너무 적게 나오지 않도록 ‘적정 수율’을 맞추는 동작을 거듭 재현할 수 있으면 된다. 적정 수율은 커피가 지닌 성분 중에 18~22%만 잔에 담기도록 추출 조건을 맞추면 달성할 수 있다. 1950년대 미국국립커피협회(NCA)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의뢰해 만든 개념인데, 이를 기준으로 삼아 모든 커피 도구의 추출 조건이 정해졌다. 예를 들어 에스프레소를 제조할 때 커피 14g을 담아 25초 추출하거나, 커피 10g을 담을 때 물 150g을 3분간 나눠 붓는 드립 커피의 방식은 모두 적정 수율에 따라 만들어진 레시피다.


일관성 준수가 중요

똑같은 커피로 매번 같은 맛을 내려면 저울과 초시계를 사용해 커피와 물의 양, 둘이 접촉하는 시간을 정확히 재야 한다. ‘커피는 영혼으로 내리는 것’이라면서 무게와 시간을 재지 않고 오직 ‘감’으로 커피를 추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감각도 변수가 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일관성을 준수해야 커피의 맛을 깨우칠 수 있다.

추출법이 항상 같아야 커피 맛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커피를 볶은 뒤 시간이 지날수록 신맛이 날카로워지고, 향기 성분이 줄어들어 입체감이 떨어진다. 손재주를 아무리 부려도 커피 자체를 바꾸는 것만큼 인상적으로 맛을 바꿀 수 없다. 품질이 좋은 커피로 내리면 맛이 좋고, 결점이 있는 커피로 추출하면 맛이 나쁜 것이 순리다.

모카포트, 사이폰(진공 커피포트), 제즈베(커피 주전자) 등 불을 사용해 위험이 따르는 추출법을 활용할 때는 그다지 요란하지 않다. 커피와 물의 비율을 맞추고 정해진 시간 열을 가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손재주를 탈 여지가 많지 않아 추출하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식의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반면 주전자로 물을 부으며 성분을 추출하는 드립 커피는 잡음이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감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탓에 같은 사람이 내렸다고 해도 번번이 맛이 달라진다. 이런 경우 대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추출한 커피의 맛이 ‘정답’인 양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선생님처럼 물줄기를 뿌려야 커피 맛이 좋아진다’는 식의 엉뚱한 말이 돌면서, 소위 ‘주전자 돌리기’가 실습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커피 추출은 사용하는 커피에 따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포착함으로써 그 품질을 가늠할 수 있는 절차가 돼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듭하면서 소비자들은 스스로 커피의 품질을 구별하는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커피 귀했던 시절의 부작용 

“커피의 맛이 손기술에서 나온다”는 그릇된 신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드리퍼에 종이필터를 장착하고, 커피를 담은 뒤 뜨거운 물을 통과시키는 여과법은 ‘핸드 드립’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영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일본식 표현이다. 1908년 독일의 멜리타 벤츠 여사가 발명해 특허 등록한 것인데, 유럽이 세계대전에 휩싸인 사이 일본이 이를 먼저 대중화했다. 특허를 피하기 위해 드리퍼의 모양을 살짝 바꿔 멜리타와 유사하다는 의미로 ‘가라 멜리타’라고 부르던 것이 점차 ‘칼리타’로 굳어졌다. 이 방식이 일제 강점기 우리에게 전해져 일본식 추출법으로 알려졌는데, 일본인 특유의 탐구력이 추출법을 섬세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선을 넘은 측면이 있다.

커피가 귀하던 시절, 한 종류의 커피만을 종일 만지작거린 것이 커피 음용의 본질을 벗어나게 했다. 커피도 포도처럼 농산물이기 때문에 와인과 마찬가지로 테루아(Terroir·토양, 기후, 지형 등 맛을 내는 자연환경 전반)의 가치를 추구한다. 커피의 맛은 나무가 자란 땅과 기후, 재배자의 전통과 열정이 결정한다는 믿음이 커피에서도 통한다.

한 잔의 커피에는 한 줄기 바람, 햇살, 빗방울 등 그 해 나무가 겪었던 환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같은 농장의 커피라도 해마다 맛이 다르다. 커피 맛을 통해 변하지 않는 커피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면모를 파악하면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이 ‘커피테이스팅의 진수’다. 그러므로 커피를 추출할 때는 모든 동작을 일관되게 해서 오로지 커피 자체만이 변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커피 추출의 지향점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소비지에서 만나는 커피 상태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운송과 보관의 여건이 개선되면서 소비지에서도 신선한 커피가 많아졌고, 스페셜티 커피 바람이 일면서 품질 좋은 커피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됐다. 이에 발맞춰 로스팅 정도도 달라졌다. 묵은 커피가 많았던 시절 좋지 않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진하게 볶았던 관습에서 벗어나고 있다. 살짝 볶아도 묵은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옅게 볶아 풍성한 향을 머금게 하는 기법이 널리 퍼지고 있다. 볶아진 원두의 물리적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커피 추출도 변화와 개선이 불가피해졌다.

이와 함께 커피가 건강에 좋다는 다양한 연구 결과가 전해지면서, 클로로젠산이나 폴리페놀류 화합물 등 생리활성 물질을 되도록 많이 잔에 담기게 하는 추출법이 보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픽의 확산 법칙(Fick’s law of diffusion)’에 따라 성분 추출과 추출수의 투입 속도를 조절해 유효 성분들이 잘 추출되도록 온도, 접촉시간, 커피와 물의 비율을 조정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또 커피가루와 물 사이에 형성되는 네른스트 층(Nernst layer)을 얇게 하기 위해 가루를 보다 가늘게 갈고, 물을 천천히 닿게 하는 한편 추출시간을 길게 하는 추출법이 주목을 끌고 있다. 네른스트 층이 두꺼울수록 추출 속도가 느려지고 맛이 약해진다. 물리적인 양상이 바뀌면 추출성분이 바뀌고 맛도 달라진다.

커피 추출은 현란한 손재주에 의지하는 데에서 벗어나야 한다. 커피 생두의 성격을 올바로 드러내기 위해 첨단 과학이 동원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오로지 커피의 본성·본질이다.

 

<strong>필자 박영순</strong>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 영어영문과 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커피인문학』 등을 저술했다.
필자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 영어영문과 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커피인문학』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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