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비우당, 지봉 이수광의 우거
세종 때 청백리 유관이 초당 지은 집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지봉이 재건
겨우 비바람 가린다는 뜻에서 ‘비우당’
정순왕후가 염색으로 생계 이은 샘터도
해박한 지식·유려한 사교술의 ‘세계인’
국내 첫 문화백과사전 ‘지봉유설’ 편찬
뛰어난 시와 문장 베트남서 널리 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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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신동 낙산의 동쪽 줄기인 지봉(芝峯)에 자그마한 초가집이 하나 있어 시선을 끈다.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집의 입구에는 ‘이수광의 집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우연히 지나다 처음 마주했을 때 구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수광이 누구인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 저자가 아니던가’ ‘그 천재가 여기서 살았구나’ ‘그래서 호를 지봉으로 썼구나’ 등의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비를 피한다’는 뜻의 이 초라한 집이 대작의 산실이라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집터는 원래 지봉의 외가 5대조로서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청백리 유관(1346~1433)의 것이었다. 지봉은 이곳에 초당을 지으면서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비를 가렸던’ 고사를 취해 ‘비우당’이란 당호를 지었다(『동국여지지』).
“유 정승께서 이곳에 몇 칸의 초가집을 지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가지고 지붕에서 새는 빗물을 받치셨다고 하니 지금도 이 고사가 전해져 아름다운 일로 일컬어지고 있다. 내가 예전 모습 그대로 이 당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하여 말한 것이다.(『지봉집』)”
지봉은 임진년의 왜란으로 집이 주춧돌도 남지 않고 타버리자 두려운 마음으로 자그마한 초당을 짓고 ‘겨우 비바람을 가린다’는 뜻의 ‘근비풍우(僅庇風雨)’에서 이름을 취해 ‘비우당’ 편액을 걸었다(『동원비우당기』). “도(道)는 민생의 일상생활 중에 있다(『채신록』)”고 여긴 지봉의 생각과 그 실천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이 우거를 사랑해 ‘비우당 팔경’에 봄 버들, 복사꽃, 지초, 솔 그림자, 낙산의 구름, 저녁 비, 개울, 달밤 등 여러 풍경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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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는 암석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 있다.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송씨가 염색을 해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붉은 색소를 함유한 지초를 샘물에 담가 염색했을 것으로 구보는 유추한다.
송씨는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영월로 쫓겨가자 창신동 정업원(淨業院)에서 평민 신분으로 살며 이곳 샘터에서 염색일을 해 생계를 이었다. 송씨가 이 샘터를 찾았을 무렵에는 유관의 후손이 집터 주인이었을 터였다. 구보는 인연이 그렇게 닿았구나 생각하며 묘함을 느낀다.
이수광(李?光, 1563~1628)은 태종의 6대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뛰어난 문장으로 세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고, 인조반정 후 시무책 12조를 지어 올린 인물이다. 그는 어려운 정국을 지나면서도 철저한 자기 관리로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광해군 6년이던 1614년 편찬한 『지봉유설(芝峯類說)』은 그 자신의 업적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사상사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꼽힌다. 『시경』 『춘추』 『예기』 등 춘추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經書)에서 고서와 고문을 뽑고 348명의 글을 참고해 썼다. 시문은 물론 군도(君道), 어언(語言), 기예(技藝), 식물 등 25개 부문 82개 항목에 3435개 조목을 집어넣었다.
실학자답게 『천주실의』도 소개했다. 권두에 그의 자부심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로 중국에 알려지고, 박학하고 아존(雅尊)한 선비가 뒤를 이어 나왔건만 전기(傳記)가 없음이 많고, 문헌에 찾을 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하략).” 『지봉유설』은 공리공론만 일삼던 당시 학계에 무실(務實: 실리와 실천 중시)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지봉은 허균(1569~1618) 누이로 시인이던 허난설헌의 재주를 평가하면서도 “위작이 많다”고 지적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언급하며 왜(倭)의 침입을 경계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보였다. “유사(儒士)들이 사사로운 출입에도 홍의를 착용하다가 명종 때 연달아 흉년을 당해 백의를 입는 것이 습속화됐으나 공회에는 홍의를 착용해야 한다(『국조보감』)”란 언급은 흰옷이 상(喪) 중에 입는 옷이라는 중국인들의 시선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객관적 판단이었다.
이수광은 최초의 한류 전도사였다. 1597년 진위사(陳慰使)로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각국 사신들의 숙소에서 70대의 베트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나 50여 일간 교류하며 시를 지었는데, 그의 문장에 반한 풍극관이 지봉의 시 ‘증안남국사신(贈安南國使臣)’ 2수와 ‘안남사신만수성절경하시집서(安南使臣萬壽聖節慶賀詩集序)’ 등을 베트남에 소개했다.
베트남의 식자층은 이수광의 문장에 열광했고, 전사해서 애송했다. 베트남 팬들은 지봉의 시에 붉은 묵으로 비점(批點)을 치며 암송했다(『지봉집』). 구보는 ‘배움은 활쏘기와 같아서 지향하는 바가 중요하고, 연습을 통해 숙련을 이룬다’는 학습론에 바탕을 둔 지봉의 문장이 충분히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가 닿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수광도 생전에 자신의 문장이 베트남에서 널리 암송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완벽을 통해서였다. 진주 출신 선비로 1597년 정유재란 때 약관의 나이로 일본으로 납치됐던 인물이다. 조완벽은 처음에는 사쓰마번으로 끌려가 종살이하다 이후 교토의 무역상에게 팔려 갔다. 무역상은 한자에 능통한 조완벽을 활용했다. 이에 조완벽은 베트남에 세 번이나 다녀오게 된다. 무역상은 사업을 마친 후에도 약조를 지키지 않다가 주변 일본인들의 비판을 받자 비로소 그를 풀어주었다.
조완벽은 선조 40년인 1607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조완벽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한 고관이 그에게 책 한 권을 내밀며 “조선의 이수광이 쓴 시”라고 소개했고, “서원에서 많은 유생이 이 시를 암송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조선에 돌아온 조완벽은 진주 사람 김윤안에게 그간의 일을 일러줬고, 이 이야기는 이수광에게도 전해졌다(『매창집』).
이수광은 『지봉집』에 ‘조완벽전’을 따로 써 놀라움을 남겼다. 지봉이 연경 방문 기록을 담은 ‘북행록’에 남긴 일화에는 유구국(오키나와) 사신과의 교유도 들어 있어(『간이집』) 그가 일찍이 한류 홍보대사로서 자질이 출중했음을 방증한다.
구보는 낙산을 내려오며 400여 년 전 다양한 관심사와 해박한 지식, 유려한 사교술로 무장한 ‘세계인’이 조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흥미로워한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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