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김 부장 이야기’로 류승룡이 그려 낸 웃픈 중년의 초상
원작에 인간적 연민의 시선 더해
현재 살아가는 가장의 자화상에
사회적·사적 감정의 이중주 표현
과연 우린 잘 살고 있는 걸까. 현 중년 세대가 JTBC 토·일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면 절로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다. 이 드라마는 제목부터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의 서열을 노골적으로 전시해 놓는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이 네 단어의 조합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네 중산층이 추구해 왔던 성공의 목표이자 중년 가장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획득해야만 했던 훈장들의 나열이다. 하지만 과연 이들 단어의 조합은 여전히 그런 의미일까. 오히려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의 허망함과 벼랑 끝에 몰린 가장들의 비명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2021년에 쓰인 이 드라마의 원작 웹소설은 당시 부동산 폭등기와 맞물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자산 격차의 박탈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원작은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대기업 직장인들의 속물근성과 인정투쟁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묘사했다. 연민보다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그린 것. 이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는 그 냉소적 톤을 가져오면서도 그 안에 김 부장이 어째서 그런 속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인간적인 연민의 시선’을 더했다. 허세 가득한 갑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는 불안 가득한 자아가 떨고 있는 김 부장을 표현했다.
이런 변주를 하게 된 건 현재의 사회적 공기가 원작이 집필되던 시기와는 또 달라졌기 때문이다.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상시화하면서 ‘대기업 부장’이란 타이틀은 더 이상 영원한 철밥통을 보장하지 않는다. 김 부장은 “대기업 25년 차 부장으로 살아남아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라고 세뇌하듯 얘기하지만 그 말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임원 승진을 목전에 두고 지방 공장으로 좌천되고, 회사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퇴직하며, 불안감에 덜컥 부동산 사기까지 당하면서 추락을 거듭한다. 성장신화가 끝난 자리에서 오직 버티는 것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가장의 처절한 생존기만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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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은 허세로 ‘영포티’라는 환상을 꿈꾸지만 팀 내에선 ‘꼰대’로 멸시받으며 구조조정이란 실존적 공포 사이에 낀 김 부장은 웃고 있지만 슬프고, 울고 있지만 웃기는 말 그대로 ‘웃픈’ 중년의 초상이 아닐 수 없다. 류승룡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도드라진 이유도 그래서다. 류승룡이 아니면 누가 이토록 웃픈 페이소스의 시대적 페르소나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을까. 류승룡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가장 자유롭게 넘나드는 배우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에서 보여 준 소시민적 영웅이나 ‘무빙’의 재생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의 처절한 부성애,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표현한 사회적 약자의 무구한 사랑까지 그의 필모에는 ‘가장’이란 단어가 늘 따라붙는다. 그는 울면서 웃게 만들거나 웃으면서 울게 만드는 ‘페이소스 연기의 달인’이다.
류승룡은 회사에서 김 부장이란 사회적 얼굴과 집에서 김낙수란 사적 얼굴로 그 갭 차이가 만들어 내는 감정의 이중주를 그린다. 회사에서는 부하 직원들의 꼰대이자 상무의 손발이면서 경쟁자인 젊은 부장에게 밀리지 않으려 발악하는 인물이지만, 집에선 가족을 위해 뭐든 하려 애쓰는 짠한 가장이다. 자신이 살아왔던 기준(대기업, 자가 등등)대로 가족 역시 살아야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하며 소통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가족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국 직장에서 밀려나 집으로 돌아오는 김 부장을 “수고했다”며 아내가 꼭 안아 줄 때 이 허세 가득했던 쓸쓸한 가장은 진짜 자신으로 돌아와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 낸다. 류승룡은 이 양가적 인물에 설득력을 부여하고자 꼰대 같은 모습들은 코믹하게 연기하고, 가끔씩 드러나는 진짜 얼굴에는 짠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꺼내 놓는다.
사실 최근 유행하는 ‘영포티’란 신조어는 젊어진 중년 세대를 뜻하는 것이지만, 여기엔 쓸쓸한 정조가 담겨 있다. 최신 유행을 따라 하려 애쓰고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쩌면 나이 드는 데 대한 불안이 만드는 착각일 수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류승룡이 “나이 듦을 인정하지 못하는 영포티라는 슬픈 단어가 있지 않냐”고 말한 건 그래서다. 류승룡이 김 부장이란 인물로 보여 주는 ‘젊은 척’은 우스꽝스럽지만 슬프다. 회식 자리에서 유행어를 어설프게 따라 하거나 MZ세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짓는 모습은 세대 간 단절을 확인시켜 줄 뿐이어서다. 류승룡은 이 ‘어긋남’을 코미디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 웃음 끝에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아저씨, 꼰대, 아재, 개저씨…. 중장년 남성을 지칭하는 말들에는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젊은 세대와 단절돼 있고, 어딘가 짠하지만 그럼에도 부정적 인상이 강한 그런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의 결과로 세대와 성별 갈등이 생겨나지만, 그들이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란 사실은 과연 그러한 배척만이 능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들 스스로 과거가 아닌 현재의 가치에 맞는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려는 노력이 전제돼야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소통해 보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부정과 공감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김 부장이란 인물을 통해 웃기면서도 슬픈 중년의 페르소나를 완성한 류승룡의 노력은 중장년 세대에게도, 젊은 세대에게도 작은 소통의 물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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