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군사명저를 찾아서
존 라티머. 2021(2001). 『전쟁에서의 기만』 Jon Latimer. 2021(2001). 『Deception in War』. Overlook Books.
노르망디 상륙 숨긴 ‘보디가드’ 작전
‘종교일 공격’ 이집트의 이스라엘 침공
적 지휘관 선입견·희망적 사고 역이용
단순한 위장 아닌 전략적 작전설계
정찰·감시 발전할수록 필요성도 커져
미래전 필수적 군사교리로 이해해야
‘전쟁은 속임수다.’ 『손자병법』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구절이다. 전쟁에서의 ‘승부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적에게 있다(可勝在敵)’는 언명도 따지고 보면 적이 속아줘야 이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전쟁을 이해하는 데 속임수(기만)를 빠뜨릴 수 없다. 영국군 장교 출신인 존 라티머의 책 『전쟁에서의 기만』은 전쟁의 은밀한 속살을 보여주고 있다.
|
노르망디의 비밀, 보디가드 작전
전쟁사에서 전략적 기만이 결정적 순간을 좌우한 사례는 많다. 이 가운데 정점으로 평가되는 것은 단연 ‘보디가드(Bodyguard) 작전’이다. 보디가드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을 은폐하고 독일군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근본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해 설계된 전구(戰區) 규모의 종합 기만 작전이었다. 연합군은 가공의 군단을 만들고 여기에 가짜 장비(풍선으로 만든 전차 등), 이중간첩망, 무선 트래픽 조작 등을 결합해 칼레가 주 공격축일 것이라는 히틀러의 기존 인식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에게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인식됐던 조지 패튼을 가짜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도 주효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은 실제 상륙 후에도 오랫동안 예비대를 이동시키지 못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보디가드 작전은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다. 상대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게끔 만드는 고도의 작전술이다.
해군과 공군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 해군은 위장 상선(Q-ships)을 운용해 독일의 잠수함을 유인했다. 반면 독일군은 공장지대나 다리를 위장함으로써 연합군의 폭격기를 속였다. 지금의 5세대 전투기 스텔스의 기능도 그 자체가 레이다를 속이기 위함이다.
적 지휘관의 마음을 겨냥
저자는 기만이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적 지휘관의 마음을 겨냥한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강조한다. 지휘관들은 자신의 경험, 교리적 틀, 조직문화에서 형성된 인지적 틀(template)을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일종의 인지적 편견을 갖고 있는 셈이다. 기만은 이러한 취약성을 기초로 적이 이미 갖고 있는 선입견과 희망적 사고를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 자체보다 행동이다. “적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는 더들리 클라크의 원칙은 기만의 작동 메커니즘을 가장 명확히 표현한 문장이다.
기만이 성공하려면 중앙집중적 통제(central control)와 전군 차원의 조정(coordination)이 필수다. 정보, 작전, 군수, 공보, 첩보 등 모든 영역이 정교하게 결합돼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만은 정보참모의 보조 기능이 아니라 작전참모가 주도하는 하나의 작전(operations)이다. 철저한 준비와 적시성(timing)은 기만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다. 기만은 적의 관측과 판단, 반응 시간을 고려해 점진적으로 구축돼야 하며, 진짜 계획과 기만 계획의 상호 일관성도 엄밀히 유지돼야 한다.
기만의 본질은 속임수지만 속이기 위해서는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돼야 한다. 기만 정보의 일부는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쪽 사실과 다양한 감각적 신호·정황 정보가 서로를 조응하면서 거대한 속임수가 작동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기만전을 체계화했던 클라크가 “거짓은 진실이라는 보디가드(bodyguard of truth)에 둘러싸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중간첩망이 독일군을 속일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구조적 신뢰성 덕분이었다. 영국군 이중간첩이었던 테이트가 독일에 전달한 정보의 80%는 사실이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
기만의 방법과 수단
기만은 창의성이 발휘되는 ‘술(術·art)’의 영역으로, 상상을 넘어서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모호성(Ambiguity)을 증가시키는 ‘A 유형’과 상대방의 오판으로(Misleading) 이끄는 ‘M 유형’이 있다. 전자는 적의 결심을 지연시키고 후자는 적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 실제 작전에서는 두 방식이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기만의 수단은 △대감시(counter-surveillance) △의도적 노출(displays) △양동(feints) △시위(demonstrations) △책략(ruses)이란 다섯 범주로 정리된다. 대감시는 적이 아군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잘못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다. 은폐나 야간 이동, 전파 침묵이 해당된다. 의도적 노출을 적이 오판하도록 가짜 표적이나 장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양동은 소규모 병력으로 ‘공격할 것처럼’ 행동해 적의 주위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시위는 실제 전투 없이 위협만 가하는 대규모 과시전력을 말한다.
책략은 보다 고차원적이다. 허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문서를 분실한 것처럼 꾸미거나 가짜 무전으로 부대 이동을 속이는 행동이다. 실제 기만 작전이 이뤄질 때 이러한 요소들이 거의 다 사용될 정도 정교하게 진행된다.
2차 대전 이후 최고의 기만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1973년 이집트의 이스라엘 침공(욤 키푸르 전쟁)은 많은 요소가 한꺼번에 사용됐다. 이집트군은 이스라엘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수개월간 반복된 훈련 패턴을 유지했다. 또 전쟁 의도가 없음을 상징하는 허위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수에즈 운하 도하 장비는 교량 보수 장비처럼 속여 운반했다. 종교일엔 공격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이용해 이슬람교의 라마단과 유대교의 욤 키푸르가 겹치는 날을 공격 개시일로 택했다. 이집트는 전쟁을 벌일 의도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이스라엘 정보당국의 기존 생각을 적극 활용해 성공적인 기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정보혁명 속의 기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감시정찰 자산을 보유하게 될 미래에는 어떨까? 저자는 기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오히려 정찰·감시(ISR), 위성·드론, 실시간 데이터 흐름, 자동화된 분석 체계가 발전할수록 기만은 더 강력하고, 필요성도 커진다. 이유는 명확하다. 정보의 양이 증가할수록 지휘관은 본능적으로 탐색을 단순화하고 알고리즘은 패턴 기반 의사결정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기만이 침투할 수 있는 새로운 인지적 틈을 발생시킨다.
저자는 미래 기만의 핵심 영역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센서와 알고리즘을 동시에 속이는 다층 기만이 필요하다. 단순한 시각 기만이 아니라 전자 스펙트럼, 통신 패턴, 행동 데이터까지 동시에 설계되는 기만 체계가 요구된다. 둘째, 정보 과부하 환경에서 발생하는 ‘해석 실패’가 새로운 치명적 취약점이 된다. 진주만과 바르바로사에서 봤듯 데이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휘관이 기존 인식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기만이 성공했다. 셋째, 현대 전쟁은 ‘물리적 전장’보다 ‘인지적 영역’을 중심으로 움직이므로 기만은 작전 능력의 일부가 아니라 전쟁 수행 자체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기만은 단순한 위장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 능력과 작전설계의 한 부분으로 평가될 수 있다. 미래의 지휘관은 기만을 ‘금지된 기술’이 아니라 ‘필수적 군사교리’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풍부한 사례와 함께 원리적 요소를 잘 정리하고 있어 기만 작전역량을 키우는 데 더없이 좋다. 각급 지휘관이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빨리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