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우자 더 묵직해진 이 배우의 존재감

입력 2025. 12. 17   16:47
업데이트 2025. 12. 17   16:50
0 댓글

정덕현의 페르소나 
김고은, 섬뜩함과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안티히어로 

침묵·결핍·고립…표정 없이 고요한 날것의 얼굴
‘칸의 여왕’ 전도연 앞에서도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공허한 사이코패스 열연
로맨스 여주인공 이미지 버리고 내면에 에너지 응축…넓어진 연기 스펙트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자백의 대가’ 모은 역 배우 김고은.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자백의 대가’ 모은 역 배우 김고은. 사진=넷플릭스



시대는 왜 영웅을 요구할까? 무언가 개선해야 할 게 있어서다. 그것도 현실적으로는 잘 이뤄지지 않는. 때때로 안티히어로가 등장하기도 한다. 겉보기엔 분명 악당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하는 행동은 영웅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이들은 왜 탄생하게 됐을까. 그건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바꿀 수 있는 현실의 무게를 말하는 건 아닐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자백의 대가’에서 김고은이 연기한 모은이란 인물은 한국 드라마 사상 보기 드문 여성 안티히어로다. 치과의사 부부를 잔인하게 독살한 범인으로 수감된 재소자이자 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을 지닌 인물로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부른다. 이 인물이 그저 단순한 사이코패스 캐릭터였다면 김고은이라는 배우가 매력을 느꼈을 리 없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으로 보였던 이 인물을 단번에 끔찍한 비극의 주인공이자 통쾌한 복수극의 안티히어로로 바꿔 놓는다.

스릴러에서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종종 과장된 표정이나 기괴한 웃음으로 표현되곤 했다면, 김고은이 연기한 모은은 철저한 ‘결핍’과 ‘침묵’으로 그려진다. 김고은은 감정이 거세된 듯한 무표정과 공허한 눈빛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목적의식을 숨겨 둔다. 정적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작고 낮은 목소리는 오히려 그 침묵을 긴장하게 만든다. 김고은은 이 모은이란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자 쇼트커트 헤어스타일로 변신했다. 죄수복을 입고 등장하는 제한된 환경에서 짧게 잘린 머리카락과 그로 인해 드러난 목선, 날카로운 턱선은 모은이 지닌 ‘서늘한 카리스마’를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이는 전작 ‘파묘’에서 이화림이라는 무당 역할로 보여 줬던 화려한 복식에 짙은 메이크업, 역동적인 굿판 퍼포먼스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김고은은 화려함을 걷어 낸 자리에 남은 날것의 얼굴, 화장기 없는 창백한 맨얼굴로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모은의 고립감을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김고은이 빛나는 건 함께 연기한 전도연과의 호흡에서 보여 준 압도적인 리드 연기 때문이다. 김고은은 2015년 영화 ‘협녀, 칼의 기억’에서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앳된 신인이었지만 10년 후 ‘칸의 여왕’ 앞에서도 그 아우라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은 전도연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고은 씨를 보면서 제가 성장이 멈췄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성장해 있었다.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고 의지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도연이 밝힌 이 말은 단순히 함께 출연한 선배의 덕담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 자체가 모은이란 인물이 끌고 가는 것이고, 이를 연기한 김고은이 리드하는 입장에 서 있는 작품이어서다. 김고은은 선배 배우가 마음껏 감정을 터뜨릴 수 있도록 단단한 벽이 돼 주거나 때로는 그 감정을 받아치는 반사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게다가 이 작품의 긴장감과 반전은 모은이란 인물의 ‘불확실성’에 기대고 있다. 이 인물이 남편 살해 용의자로 몰린 안윤수(전도연 분)를 돕는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파멸로 이끄는 것인지 알 수 없게 행동하므로 드라마는 극적인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전도연이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연기를 펼칠 때 무감정하며 차가운 응시로 상대를 제압하는 김고은은 얼음 같은 연기를 펼친다. 그래서 이 둘의 연기 앙상블은 가깝지도 또 멀지도 않은 독특한 관계의 ‘여성 서사’를 만들어 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자백의 대가’ 모은 역 배우 김고은.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자백의 대가’ 모은 역 배우 김고은. 사진=넷플릭스

 



김고은은 2012년 영화 ‘은교’라는 파격적인 작품으로 데뷔하며 곧바로 충무로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 후 ‘도깨비’의 사랑스러운 연인, ‘유미의 세포들’의 생활밀착형 직장인, ‘영웅’의 비극적인 정보원, 2024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파묘’의 카리스마 넘치는 무당 화림에 이르기까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다.

특히 올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은중과 상연’은 30년에 걸친 두 여성의 우정과 애증을 그린 휴먼 멜로드라마로 10대 고등학생부터 20대 대학생, 40대 중년의 모습까지 모두 직접 소화했다. 그 나이대에 맞는 인물의 변신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표현해 냈다. 그래서일까. 올해 공교롭게도 넷플릭스에서 연달아 공개된 2편의 오리지널 시리즈 ‘은중과 상연’ ‘자백의 대가’는 김고은이란 배우가 그간 성취해 낸 연기의 스펙트럼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지표처럼 보인다. 살인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와 30년에 걸친 두 여성의 우정과 애증을 다룬 휴먼멜로. 장르적으로도 극단에 놓여 있는 이들 작품에서 김고은은 평범한 일상의 얼굴과 광기 어린 비일상의 얼굴을 넘나들었다. 또한 연기 앙상블에서도 김고은은 두 작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선보였다. ‘은중과 상연’에서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박지현의 행동에 맞춰 ‘받아 주는 연기(리액션)’를 선보였다면 ‘자백의 대가’에선 정반대로 전도연의 리액션을 유발하는 ‘이끄는 연기(액션)’를 보여 줬다.


‘자백의 대가’에서 모은이란 희대의 마녀이자 안티히어로를 끄집어낸 김고은의 연기는 여러모로 ‘파묘’의 화림 역할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전까지 주로 로맨스 여주인공으로 각인됐던 이미지를 산산이 부숴 버린 무당 연기가 그 광기와 에너지를 바깥으로 뿜어내는 것이었다면 모은은 그 에너지를 내면으로 응축시킨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꺼내지 않아 더욱 밀도가 높아진 에너지라고나 할까.

이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독보적 안티히어로가 탄생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스스로 선택한 범죄자의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이 복합적 감정을 갖게 만드는 연기는 이제 어떤 역할도 자신만의 색깔로 채울 김고은이란 믿고 보는 배우의 등장을 예감케 한다. 현실의 응어리가 뭉쳐져 만들어지는 어떤 캐릭터도 자신만의 색으로 채워 넣는.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