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성찰을 일깨우는… 삭힘의 미학

입력 2026. 02. 19   14:57
업데이트 2026. 02. 1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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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영산포, 홍어가 이룬 포구

자산어보에 “입춘 전후 살지고 맛나”
주산지 흑산도에선 신선한 채로 즐겨
조선 태종 때 섬 주민 이주 정책 계기
내륙 영산포로 운반 중 ‘톡 쏘는’ 발견
포구를 메운 홍어집 옛 영화 사라지고
‘남도의 밤식탁’ 시구에 그리움만 남아

홍어는 한국인만이 먹는 음식이자 대표적인 호남의 맛으로 꼽힌다. 전라도 사람들은 주산지인 흑산도가 가까이 있는 까닭에 ‘추우면 홍어’라고 말할 정도로 홍어를 즐긴다. 광주 양동시장이 전국 홍어의 90%를 거래하는 데서도 홍어와 호남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구보가 기억하기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잔치에 홍어가 빠지면 잘 먹고도 “근디 홍어가 없드마”란 험담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홍어는 남도와 만나 시(詩)가 됐다. 풍경이 도와주면 더욱 그러하다. 구보는 2016년 2월 말 친구들과 떠난 호남 맛기행에서 폭설을 만나 고속도로에서 영암으로 빠진 다음 눈을 피해 식당에 들어갔다가 9000원짜리 백반의 곁찬으로 나온 홍어찜과 조우했다. 흩날리는 함박눈이 들어 맛을 배가시켰다. 손님이 없던 차라 60대 후반의 주인은 흥 타령을 읊어 맛을 돋웠다. 주객이 함께 홍어에 취해가는 모습은 시 속 풍경에 다름 아니었다.

영산포를 상징하는 홍어.
영산포를 상징하는 홍어.


그러니 올 때는 
남도 산천에 눈이 녹고 
참꽃 피면 오라 
불발기 창 아래 너와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아 맵고도 지린 홍어의 맛 
그처럼 밤도 깊은 남도의 식탁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며 
눈이 온다. 
- 송수권, ‘남도의 밤식탁’ 


영산포 포구.
영산포 포구.


정약전(1758~1816)은 『자산어보』에서 ‘동지 후에 비로소 잡기 시작하고 입춘을 전후한 때가 살지고 맛난다’고 썼다. 홍어는 추울 때가 제맛인 음식이다. 3·4월이 지나면 야위고 맛이 떨어져서 호남 사람들은 “진달래 핀 후에는 먹지 말라”고 이른다. 홍어는 흔히들 삭힌 음식으로 알지만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구보는 1983년 처음 흑산도를 찾았을 때 맛본 홍어회가 삭힌 냄새를 풍기지 않아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주민들이 말했다. “아니 이렇게 싱싱한 놈을 왜 썩혀 먹어요?” 원산지에서는 썩혀 먹지 않는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이 흑산도의 홍어는 육지로 옮겨지면서 변신한다. 지금도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 들어서면 익숙한 홍어 삭힌 냄새가 진동한다. 

영산포는 흑산도와 뱃길로 연결되는 까닭에 홍어의 메카가 됐다. 조선 태종이 ‘왜구 침략을 야기한다’며 섬 주민을 내쫓는 공도(空島) 정책을 펴면서 흑산도 어민들도 나주로 이주해 영산포를 형성했다. 영산은 흑산의 별칭이었다. 그에 따라 강 이름도 남포강에서 영산강으로 바뀌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흑산도 산지에서 조업한 배가 영산포로 돌아오는 데는 닷새 이상 걸렸다. 조업지와 출하지가 멀어져 운반 과정에서 홍어가 삭았고, 이 우연한 발견이 차이로 특화되면서 삭힌 홍어 시대를 열었다.

배가 돌아오면 조무래기 아이들이 달포 너머 못 본 아버지와 삼촌들을 만나러 포구로 쏟아져 나왔다. 배에서 부린 홍어는 포구 앞 장에서 거래돼 집집으로 옮겨졌고, 어른들은 사 온 홍어를 두엄더미에 던져 삭혔으며, 그 냄새에 아이들도 침을 흘리며 홍어가 숙성되기를 학수고대했다고 영산포 노인들은 회상한다.

호남을 상징하는 음식 홍어찜.
호남을 상징하는 음식 홍어찜.


서해에서 영산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목포(木浦)가 있고, 굽이굽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무안을 거쳐 영산포에 닿는다. 목포항에서 40여㎞ 떨어진 내륙이다. 물때와 기후의 영향을 받는 범선으로는 이삼일은 더 가야 닿는 곳이다. 강가에는 1915년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가 설치돼 지금도 남아 있다. 더 이상 배가 다니지 않는 영산강을 따라 목포에서 1시간을 차로 달려 영산포로 향하며 구보는 ‘옛사람들은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왜 목포에 부리지 않고 힘들게 내륙에까지 싣고 간 걸까’ 궁금해했다. 알고 보니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구보는 비로소 이해가 됐다. 서해안 사람들은 읍성을 쌓기도 했지만 빈번한 왜적의 침략을 견디기 어려웠다. 홍어가 내륙 깊숙한 곳에 부려진 배경이다.

영산포는 곡물과 어물의 집산지답게 조운선·어선·상선이 통행하면서 객주와 숙박시설이 발달해 세를 키웠다(『나주목 읍지』). 옛 영산포구 자리에는 40여 곳의 음식점과 도소매 집이 ‘홍어 거리’를 형성하며 흘러간 옛 영화를 붙잡고 있다. 1월 말에 찾은 홍어의 거리에서는 흑산도산이 15만 원, 군산에서 가져오는 다른 국내산이 10만 원, 칠레산은 8만 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향의 강도와 냉동 여부에 따른 차이를 보인다.

 1960~1970년대 영산포와 나주 일대는 홍어 경제권이었을 정도로 홍어집 일색이었고, 술집들도 안주는 홍어만 취급했다(『우리 땅 남도 맛 이야기』). 한때 연간 1500톤씩 팔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영화를 뒤로 한 채 한산한 모습이다. 1976년 하구언이 생기면서 영산강 뱃길이 끊긴 까닭이다. 홍어를 특산품으로 주장할 만한 여건이 사라져 버린 채 이름만 남았다고 구보는 느낀다.

영산포에 자리잡은 ‘홍어 거리’.
영산포에 자리잡은 ‘홍어 거리’.


뱃길이 끊기자 영산포는 ‘홍어 본고장’의 타이틀을 목포에 넘겨야 했다. 1990년대에는 홍어가 바다에서도 잘 잡히지 않아 비싼 값에 거래되자 칠레를 비롯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남미에서 홍어를 수입해 와 수요를 감당했다. 원산지 표기를 하지 않던 시절이라 수입품이 국산으로 둔갑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상품인 흑산도산은 부르는 게 값이었을 정도로 귀해 여러 일화를 낳았다. 특히 내로라하는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게 홍어 명가들의 큰 고민이어서 여러 일화를 낳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실세였던 권노갑 의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목포의 한 식당에서 홍어를 먹고선 주인에게 치사한 후 포장을 부탁했다. “그 덕분에 우리 ‘선생님’이 좋아하시겠구먼잉 고맙소.” 권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지칭하는 ‘선생님’을 호명하자 일순 난감해하던 주인이 잽싸게 홍어를 낚아채 부엌으로 가더니 다른 놈으로 바꿔 들고나왔다. 계면쩍게 웃음을 날리는 주인의 표정에서 권 의원은 처음 준 홍어가 수입품이었음을 파악하고선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초 옛 영화가 빛을 잃은 영산포의 홍어 식당에 앉은 구보는 ‘우리는 이 땅에서 시적(詩的)으로 살아야 한다’고 느낀다. 삶이 밋밋하도록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삭힘의 미학을 온몸으로 시연하는 홍어를 대하면서 든 생각이었다. 코를 톡 쏘고 머리를 뻥 뚫리게 만드는 홍어찜은 섬광 같은 깨달음을 주며 삶의 성찰을 돕는다.

“날것으로 견디려 애쓰지 말고, 삭아라 푹! 홍어처럼.”

겨울 홍어 앞에서 구보도 시인이 된다. 대보름달이 영산강 위에 처연히 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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