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困難)한 삶의 축복

입력 2025. 12. 30   14:15
업데이트 2025. 12. 3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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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동 오즈세파 대표
오계동 오즈세파 대표



불교민속학 박사 조용헌의 칼럼에 불가(佛家)의 말을 인용해 “전생 도 닦아서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이 가장 하질”이라며 부잣집에 태어나면 도 닦기가 어렵고, 영적(靈的) 성숙이 어렵다고 했다. 맞는 말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세상 사는 안목이 부족하고 막돼먹은 집안이어도 스스로 일어서기가 어렵다. 잘못 배워서다. 그런 곳에서 성인이 난다면 그건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서는 것은 힘들다. 그만큼 많은 땀과 눈물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절대로 이런 땀과 눈물을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굴곡 없이 평탄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을 불가에선 ‘쉬어 가는 삶’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고독을 통한 삶의 업그레이드가 쉽지 않다. 또한 불가에선 여러 번의 생을 거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윤회의 고리를 짧게 하고자 모든 어려움을 한꺼번에 겪는 ‘중복우환(重複憂患)’의 삶을 선택한다고도 한다.

어려울수록 사람은 깊어지고, 삶의 경험은 풍부해진다. 말만 하면 가벼워 날아갈 것만 같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가벼이 살아온 과정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짐작이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부유하고 온전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을 찾아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런 사람들에게선 배울 게 있다.

인간의 감정은 슬픔 없이 기쁨을 알 수 없고, 혼란 없이 평화를 알 수 없게 돼 있다. 이른바 신성한 이분법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어렵고, 평화의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혼란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경험해야 할 것은 결국 경험하고야 만다. 지금 끔찍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면 축복해야 할 일이다. 다음 생에서 겪을 것을 미리 겪고 있으니까. 이번 삶에서 못난이로 태어났다면 축복해야 할 일이다. 내가 못남으로써 비로소 타인의 못남이 가진 비참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 삶이 심오해지고, 인간에 관한 이해도가 깊어지는 삶을 택한 것은 스스로 자랑해야 할 일이다.

삶에 어려움이 없다면 없음을 즐기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타인에 비해 탁월한 식견을 가졌다면 그 상황을 즐길 일이다. 그런 선택받은 삶을 사는 데도 즐기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을 비웃는 성향이 있다든지, 나의 교묘함에 속아 넘어가는 이를 조롱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 조심하라. 반드시 다음 생에서 내가 조롱한 그 삶을 맛볼 것이다. 그런 경험을 못 해 봤기에 그렇다.

살인자가 피살자에게 연민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살인자 스스로 다음 생에서의 피살자 역할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피살자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다. 이른바 환생법이다.

삶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냥 깊어지는 게 아니다. 탁월한 논리를 전개하는 웅변가도 한 생애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환생을 믿지 않더라도 인연법은 치열한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게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자만하지 말 일이며,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 고생하고 있다면 왜 내가 이런 삶을 사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인간의 깊이는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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