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전북 완주군 소싸움 축제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결승전이 아니어서 그런지 소싸움은 영 심심했습니다. 그날 소싸움은 경기장 중앙에 소가 있고, 다른 소를 데려와 싸움을 붙이는 식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데려오는 소들이 번번이 입장을 거부하거나 막상 들어와도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습니다. ‘소싸움에도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의문을 품을 즈음 류시화 씨의 책을 읽다가 ‘퀘렌시아’라는 단어를 접하게 됐습니다.
퀘렌시아는 투우장 한복판에서 소가 위협을 피해 잠시 숨을 고르며 전열을 재정비하는 자신만의 안식처를 뜻합니다. 투우사의 화려한 물레타(빨간 천)를 통과한 뒤 소는 반드시 본능적으로 특정한 장소로 돌아가 기력을 회복합니다. 노련한 투우사가 소의 퀘렌시아를 미리 알아차리고 점령해 버린다면 소는 더 이상 싸울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퀘렌시아가 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수리가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는 둥지, 산양이 마음 놓고 풀을 뜯는 장소, 뭔가 집중해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도 퀘렌시아입니다. 삶의 여러 버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감시를 피해 자신만의 오롯한 시간을 보내며 재충전하는 곳. 우리 인간도 그런 자리가 필요하겠지요.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엔 늘 예상치 못한 장애물인 ‘마찰(Friction)’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마찰을 극복하고 승리로 나아가기 위해 군 지휘관에게 필요한 자질로 ‘강인한 의지, 정신적 균형, 혼란 속에서도 판단을 유지하는 능력’을 꼽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전투의 긴박함 속에서도 혼자 사색하며 계획을 정리하는 시간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텐트 안의 짧은 고독은 승리를 위한 퀘렌시아였던 셈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연말이면 울리던 캐럴 소리도 저작권 문제로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가 들리고, 아파트에 설치한 성탄 트리가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며 내년엔 민원을 넣어야겠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퀘렌시아를 잃어버린 소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고 쉼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면 되는 것 아냐?’라는 반문이나 ‘옛날보다는~’ ‘라떼는~’ 식의 회고적 긍정은 퀘렌시아를 찾아가려는 소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말밖에 될 수 없습니다.
고진하 시인은 그의 시 ‘거룩한 낭비’에서 “이 휘황한 물질적 낙원에서 하느님 당신은 도무지 소용없고 소용없고 소용없는 분이시니/ 내 어찌 매우 흔한 공기를 낭비하듯 꽃향기를 낭비하듯 당신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고 낭비를 예찬합니다. 물과 공기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거저 주는 창조주, 계량화된 수치와 예산의 효율성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시도들. 시인은 창조주의 ‘거룩한 낭비’를 들어 우리의 계산적 현실을 반어적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공간력’은 사실 장병들에게 ‘퀘렌시아’를 만들어 주는 과정입니다.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심리적·영적 공간의 고민도 병행돼야 합니다.” 공간은 복합적인 퀘렌시아가 돼야 합니다. 비록 효율성의 렌즈로는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결국엔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형 전력’ 창출공간이 될 것입니다.
“종소리가 아름다운 것은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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