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알을 깬 소녀, 순수 그 이상을 품다

입력 2025. 11. 19   17:10
업데이트 2025. 11. 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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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친애하는 X’로 국민 여동생 껍질 벗고 나온 김유정

마냥 어려보이던 기존 이미지서 탈피
연민·공포 동시에 일으키는 악녀 변신
극한 막장 서사 설득력 부여하는 연기
무한한 가능성 지닌 믿고 보는 배우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 백아진 역 배우 김유정.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 백아진 역 배우 김유정.


아역 배우 출신이 성인 배우로 전환하는 과정은 단순한 나이 차원을 넘어선다. 그간 쌓여 온 아역 이미지를 털어 내고 성인으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재정립해야 하는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년이 넘는 경력으로 대중에게 ‘잘 자란 배우’이자 ‘국민 여동생’으로 각인된 김유정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최근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의 백아진이라는 희대의 악녀 역할로 김유정이 파격적인 성인 연기 변신을 선보인 건 놀라운 모험과 도전으로 이룬 성취라고 할 만하다. 몇 년 전만 해도 과연 그 순수한 아역 이미지의 김유정이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소시오패스 역할을 소화해 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공개와 동시에 “신들린 연기”라는 호평이 쏟아지면서 김유정은 단박에 ‘믿고 보는’ 성인 연기자로 급부상했다. 

‘친애하는 X’의 백아진은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갖게 만드는 복합적 인물이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와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백아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지옥 같은 가정사를 겪었다. 이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백아진에게 소시오패스 성향을 부여했다. “지옥에서 시작된 삶이라면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포스터에 담긴 문구처럼 이 문제적 인물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시로 가면을 바꿔 쓰며 필요하면 누구나 이용한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활용하고 남성들을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얻어 내는 팜므파탈이다. 원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해도.

눈앞에서 아버지가 엄마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어린 백아진은 성장해선 족쇄처럼 따라붙는 아버지를 자신을 챙겨 주는 정의파 사장을 이용해 죽게 만든다. 흔히 막장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자극적인 이야기 전개이지만, 놀랍게도 이 작품에서 김유정의 연기는 그 극단으로 치닫는 서사마저 설득력을 부여하는 힘을 발휘한다.

막장 드라마를 더더욱 막장처럼 보이게 하는 건 연기자들 역시 과도한 감정을 마구 드러낼 때 생겨나는 일이다. 하지만 김유정은 이 잔혹한 백아진을 그릴 때 ‘과장된 표현’ 대신 오히려 ‘감정을 비워 내는’ 연기를 한다. 작품 속 김유정의 눈빛 연기는 그래서 압권이다. 평상시 속내를 숨기고 있을 때는 어딘가 처연한 느낌의 눈빛을 보여 주다가 순간 발톱을 드러내며 눈에 힘을 줄 때는 섬뜩한 공포가 묻어난다. 목적을 위해 모든 걸 쥐어짜듯이 다 이용한 다음(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건다) 결과를 얻어 낸 뒤 쏟아 내는 웃음 속 눈빛은 어딘가 텅 비어 있다. 허무와 공허가 묻어나는 그 텅 빈 모습은 이 끔찍한 악녀에게서조차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 백아진 역 배우 김유정.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 백아진 역 배우 김유정.



“사람들이 아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끼도록 표현하고 싶었다”는 김유정의 설명은 오히려 이 캐릭터가 무표정으로 있을 때 만들어 내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제대로 구현한다. 격렬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통제하고 감춤으로써 서스펜스의 긴장감을 극대화한 것이다.또한 그 공허한 얼굴이 보여 주는 처연함은 이 인물의 끔찍함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의 생존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려 준다. 악녀 캐릭터로서 비난과 동시에 응원의 마음까지 겹치게 만드는 복합적인 감정적 롤로코스터가 이러한 연기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 극단을 오가는 얼굴은 그녀가 20년간 연기를 하며 쌓아 왔던 이미지를 뒤집는 방식으로 더 강렬한 효과를 냈다. 20년 동안 봐 온 ‘천사의 얼굴’에 익숙했던 시청자들에게 이 캐릭터의 이면에 숨겨진 ‘잔혹한 본성’을 김유정의 얼굴에서 발견할 때 받는 충격은 훨씬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김유정은 이 악녀 캐릭터로 그간 쌓아 왔던 이미지를 해체하는 과감한 도발을 보여 줬다.

김유정의 성인 배우로서 전환은 이 작품 하나의 충격으로 이뤄 낸 성과는 아니다. 그녀는 여타 아역 출신 배우들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성급함을 드러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선택을 했다. 영화 ‘20세기 소녀’나 ‘편의점 샛별이’ ‘홍천기’ 같은 작품에서 풋풋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조금씩 변신을 시도한 그녀는 ‘마이 데몬’ ‘닭강정’ 같은 작품으로 어느새 훌쩍 자란 성인 배우의 면모를 선보였다. 아역 배우들이 성인 전환기에 겪는 심리적 혼란과 직업적 위기를 언제 넘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고비를 넘긴 느낌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을 마련한 뒤 김유정은 자신의 연기 경력을 총동원한 도전으로 ‘친애하는 X’에서 파격적인 변신을 선택했다. 나이에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게 아니라 차곡차곡 준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도전이었기에 이 변신은 모험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친애하는 X’의 악역 선택은 이미 입증된 가능성이 통했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과거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화연이라는 악역에서 보인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 작품의 이한 감독은 김유정의 ‘순수한 눈’이 오히려 악역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 바 있다. 실제로 당시 관객들은 김유정이어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을 맛볼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두르지 않는 준비와 전략적 선택이 있었기에 김유정은 그 어렵다는 아역 이미지의 허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설 수 있었다.

김유정의 사례는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 싶은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변화는 결코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다. 철저한 준비와 전략이 필요하고, 그것이 전제돼야 모험이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다. 그저 ‘잘 자란 배우’에 머물기보다 무한한 역할의 가능성이 열린 ‘믿고 보는 배우’로 나아간 김유정의 페르소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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