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돋보기
대등한 패배, 그 다음 수(手)…캐나다 잠수함사업이 남긴 것
무기보다 파트너…독일 선택 이유
경쟁자를 협력자 삼는 전략이 현명
독일과 상호 강점 보완 땐 ‘시너지’
한미 조선협력 부처 협의로 본격화
공급망 구조 들어가는 시대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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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해군에는 뼈아픈 기억이 있다. 1998년 영국에서 중고로 들여온 빅토리아급 잠수함 4척은 도입 직후 원제작사의 지원 기반이 무너지면서 부품 하나 구하기 어려운 ‘고아 함대(orphan fleet)’로 전락했다. 30년 가까이 막대한 정비 예산을 쏟아붓고도 현재 실제 작전이 가능한 함정은 단 1척뿐이다.
지난 7월 6일 발표한 최대 12척, 60조원 규모 순찰잠수함사업(CPSP)의 평가 배점에서 성능(20%)보다 수명주기 지속운영(50%)에 압도적 비중이 실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캐나다는 잠수함을 고른 것이 아니라 향후 반세기 동안 자신을 버리지 않을 파트너를 골랐다.
선택은 독일 티센크루프해양시스템(TKMS)이었다. 최종 2파전까지 올랐던 한화오션은 예비협상대상자에 그쳤고, 여러 언론에서는 수주 실패에 대한 아쉬움을 연일 타진했다. 언론의 실망은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이번 결과를 ‘K방산의 실패’로 읽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스스로 “두 후보 모두 요구 성능을 충족한 어렵고 근소한 결정”이라고 했다. 우리 방위사업청도 성능·납기·정비지원 등 기술적 능력에서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캐나다가 독일 함정의 조기 인도를 위해 독일·노르웨이의 자국 생산 순번 양보까지 받아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납기 경쟁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한때 독일에서 설계도를 받아 잠수함을 조립하던 나라가 세계 잠수함 시장의 전통 강자와 마지막까지 대등하게 겨룬 것이다. 요컨대 열세의 패배가 아니라 대등한 패배였다.
대등했는데 왜 졌는가. 승부를 가른 것은 실력이 아니라 구도였다. 독일·노르웨이와 최대 24척의 동일 플랫폼을 공동 운용하며 부품·정비·훈련·승조원까지 공유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구조를 단독 운용국 제안이 배점표 위에서 넘어서기는 애초에 어려웠다. 나토 재래식 잠수함의 약 70%를 공급해 온 TKMS의 지원 네트워크는 ‘다시는 버림받지 않겠다’는 캐나다에 그 자체로 보증서였을 것이다.
지정학의 흐름도 유럽 편이었다. 관세 갈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흔들리자 캐나다는 지난해 말 비유럽국 최초로 유럽연합(EU)의 방산 공동조달 금융 프로그램(SAFE)에 가입하며 안보 공급망의 유럽 다변화를 제도화했다. 독일은 국방부 장관이 오타와까지 날아가 유세하고, 부총리가 캐나다 총리를 상대로 뛰는 범정부 외교전을 펼쳤다.
이 맥락에서 잠수함 선택은 단순한 장비 도입이 아니라 향후 반세기의 안보 파트너를 정하는 결정이 됐다. 필자는 이것을 ‘동맹정치형 조달’의 부상이라 부르고자 한다. 무기 조달의 준거가 ‘최적 플랫폼의 선택’에서 ‘동맹 아키텍처로의 편입’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구도에서 성능·가격·납기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지난해 폴란드 오르카 사업에서 스웨덴에 밀린 것도 같은 이유다. 무기 수출의 절반 이상이 유럽에, 그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폴란드 한 나라에 쏠린 우리 수출 포트폴리오를 불안하게 봐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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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음 수는 자명하다. 수주전마다 산업협력과 금융을 퍼붓는 출혈경쟁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구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첫째, 경쟁자 독일을 협력자로 바꾸는 역발상이다. 한국 잠수함산업은 1987년 독일 209급 기술 도입에서 출발했다. 30여 년 만에 스승과 대등하게 겨루는 제자가 된 셈인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한 번 더 반전한다. 지금 TKMS는 사상 최대인 206억 유로의 수주 잔액에 캐나다 물량까지 더해져 건조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 엔지니어가 부족해 새 조선소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지만 본격 가동은 수년 뒤의 일이다. 스승에게 이제 제자의 손이 필요해질 것이다. 독일의 ‘수주 포화’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건조 여력’이 만나는 지점에 모듈 분담 건조, 부품·기자재 상호공급망, 중동·동남아 등 제3국 공동 마케팅의 길이 있다. 한국의 리튬이온배터리와 독일의 스텔스 기술처럼 양국의 강점은 경합보다 보완에 가깝다. 경쟁 3사가 통합해 세계적 기업이 된 유럽 미사일기업 MBDA가 보여주듯 공급자 간 협력은 방산시장의 오랜 성공 공식이다. 물론 독일이 경쟁자인 우리에게 선뜻 손을 내밀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기업 간 상담에 맡길 일이 아니라 두 나라 정부 차원의 방산협력 같은 의제 설정이 먼저다. 나토의 벽은 정면으로 부딪쳐 넘는 것이 아니라 그 벽의 주인과 손잡고 우회하는 것이 현명하다.
둘째, 캐나다에 쏟으려던 자원을 동맹 시장으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캐나다 수주를 위해 상당한 규모의 무역·투자 패키지를 준비했다. 동맹 변수가 불리하게 작동하는 시장에 이만한 자원을 반복 투입하는 것은 승률 대비 비용이 과도하다. 같은 자원이라면 동맹 변수가 유리하게 작동하는 곳, 곧 미국에 써야 한다. 마침 문은 열려 있다. 15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조선협력(MASGA)이 양국 부처 간 합의로 본격화됐다. 한국의 조선사들은 미국의 조선소를 인수하고 미 해군 함정의 유지·보수·정비(MRO) 실적을 쌓으며 신조시장 진입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여기에 핵추진잠수함이라는 수십 년간 닫혀 있던 문도 열렸다. 정상 간 합의로 건조 승인과 연료 조달 협력이 추진되고 있으며, 8000톤급 3척 이상을 목표로 한미 실무협상이 시작됐다. 재래식 잠수함 수출이 동맹정치의 벽에 막힌 바로 그 시점에 잠수함 기술의 최상위 영역으로 도약할 경로가 열린 것은 우연이라기엔 절묘하다. 불확실한 수주전 대신 동맹 기반의 안정 시장과 기술 초격차 영역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때다.
물론 캐나다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도 아니다. 협상 결렬 시 한화오션으로 전환한다는 조항이 살아 있고, 24척에 이르는 물량의 납기 압박은 협상의 변수로 남아 있다. 예비협상대상자라는 지위는 관리하기에 따라 보험이 된다. 정비·부품 공급 같은 부분 참여의 기회도 여전히 열려 있다.
바둑에서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긴 대국의 복기보다 값지다고 한다. 이번 복기가 가리키는 결론은 분명하다. K방산은 이제 ‘무기를 파는 시대’를 넘어 ‘공급망과 동맹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등한 패배를 도약의 전환점으로 만드는 힘은 패배의 구조를 정확히 읽고, 그 구조 위에서 다음 수를 두는 전략적 사고에서 나온다. K방산의 담대한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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