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없이 복명복창, 군함 운전대를 쥐다
망망대해 졸음과 싸우는 고충 덜고
인간, 판단 필요한 핵심 임무에 집중
폐쇄 환경서만 구동 보안 우려 해결
전원 차단 땐 인간이 즉시 대체 가능
해군의 ‘조타’ 임무는 함정 생존과 직결되는 동시에 지독하게 외롭고 지루한 싸움이다. 졸음이나 순간의 집중력 저하는 자칫 거대한 군함의 항로 이탈 등 치명적인 인적 오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식기세척기가 가사 노동의 짐을 덜어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선물하듯, ‘로봇 조타수’는 함정 승조원들의 고된 반복 업무를 조금은 덜어줄 열쇠로 기대받고 있다. 글=조수연/사진=한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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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명복창…악천후에도 임무수행 ‘정확’
‘로봇이 군함의 타륜을 잡는다고?’ 반신반의하던 차, 눈앞에 펼쳐진 전투실험 현장은 이런 의구심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훈련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함교를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이 나왔다. 전방 대형 스크린은 진해 협수로(항로 또는 수로의 폭이 좁은 곳)를 모사했다. 화면 가득 파도가 몰아치자 순간 실제 배를 탄 듯 멀미가 날 정도였다. 함교 중앙 조타석에는 사람이 아닌 은색 인간형 로봇 ‘파이봇(PIBOT)’이 곧은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래 공군 조종사(Pilot)용으로 개발돼 조종사와 로봇(Robot)을 합친 ‘파이봇’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번엔 군함의 조타석에 전격 투입됐다. 무기체계 진화 속도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시대, 해군은 장병들의 전술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스마트 해군’으로의 항해를 힘차게 시작하고 있었다.
“침로 1-5-0, 우현 10도!”
당직사관 역할을 맡은 평가관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지시가 떨어지고 3초쯤 지나자 파이봇이 또렷한 기계음으로 복명복창했다. 동시에 정교한 로봇 팔이 타기를 움켜쥐고 신속하게 우측으로 돌렸다. 함정이 파도를 가르며 정확히 150도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날 전투실험 현장에서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KAIST 연구진이 개발한 파이봇 특유의 ‘적응력’이었다. 기존 무인 함정 기술이 배 자체의 설계를 뜯어고쳐 자율주행 시스템을 이식하는 방식이었다면, 파이봇은 사람이 앉던 기존 의자에 그대로 앉아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쓴다.
변덕스러운 실제 해양환경에 맞춰 파도가 쳐도 파이봇은 타기를 쥐고 지정된 각도를 흔들림 없이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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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타수’인가…일상의 혁명을 군함으로
현장 취재진 사이에서는 “수많은 함정 임무 중 왜 첫 로봇 대체 전투실험 대상이 조타수인가”란 질문이 쏟아졌다. 해군 관계자들은 조타수라는 직무 특수성을 들며 이른바 ‘3D(Dull, Dirty, Dangerous) 임무의 외주화’를 역설했다.
함정에서 조타수는 임의로 항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당직사관의 지시를 듣고 정해진 침로에 맞춰 각도를 조종할 뿐이다. 나침의만 주시하며 밀려오는 파도와 조류에 맞서 미세하게 타를 조작해야 하는, 지루하면서도 고충이 많은 임무다. 조타수의 컨디션이나 숙련도에 따라 타를 돌리는 힘이 미세하게 달라져 항적이 흩어지는 ‘인적 편차’도 불가피하다.
연구진은 이 지점에 주목했다. 단순하지만 지루하고, 사람이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피로를 모르는 로봇’이 보완한다면 항구적인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에 열광하는 이유와 같다. 기계가 가사 노동을 대신하는 동안 우리는 그 시간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쓴다.
군함도 마찬가지다. 파이봇이 조타석을 든든히 지키면, 그 자리에 있던 숙련된 승조원들은 레이다 표적 분석, 첨단 무기체계 운용, 함정 손상통제 등 고도의 인지적 판단이 필요한 핵심 전술 임무로 자리를 옮길 수 있다. 해군이 짜낸 가장 실용적이고 절박한 생존 전략이다.
소음과 보안의 벽을 넘다
거친 바다 위에서 로봇에게 군함의 ‘운전대’를 맡기는 것에 대한 우려도 분명 존재했다. 악천후 때 함교를 덮치는 엄청난 소음 속에서 로봇이 사관의 지시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을지, 외부 해킹으로부터 안전할지가 성공을 가를 과제였다.
실험은 이러한 실전적 우려를 불식시키는 혁신적인 기술적 해법을 제시했다. 골칫거리였던 소음 문제는 지시를 내리는 당직사관의 음성만을 명확히 분리·인식하는 고도화된 알고리즘을 적용해 돌파했다. 치명적 약점으로 꼽히는 보안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히려 ‘단절’에 있었다. 파이봇은 외부 인터넷망과 완전히 분리된 폐쇄형 로컬 네트워크 환경에서만 구동된다. 외부 클라우드 서버에 의존하지 않고 로봇 자체에 탑재된 엣지 컴퓨팅 기술로 상황을 판단하기에 적의 전파방해나 사이버 해킹 위험에서 원천적으로 보호받는다.
만에 하나 로봇 하드웨어에 결함이 발생하거나 함정 내 전원이 차단되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비상시에는 당직사관이 로봇의 팔을 밀쳐내고 직접 타륜을 잡는 직관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실험을 주관한 김형준(준장) 해군전력분석시험평가단장은 “이번 전투실험은 함정 승조원 고유의 업무 영역이었던 조함을 로봇이 오류 없이 수행할 수 있는지 분석·평가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군은 이번 전투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함정에서 로봇을 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승조원들의 업무를 경감시킬 것”이라며 “이를 토대로 병역자원 급감, 비약적인 첨단기술 발전 등 변화하는 국방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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