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게 호미 한 자루 내어주오 바다 캐어 양손 가득 담아 드리리

입력 2026. 06. 18   17:00
업데이트 2026. 06. 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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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는 대로, 닿는 대로 - 물때를 따라 걷는 ‘가로림만’의 하루

육지가 항아리처럼 담은 바다…갯벌에서 캔 바지락·게·고둥 어느새 망태기 가득
밀물 들면 이야기 간직한 사찰·‘미스터 션샤인’의 무대 100년 고택에서 꽃과 바람 즐기고
해 질 무렵 다시 열리는 갯벌로…하늘과 바다 가르는 길에 내려앉는 황금빛, 가슴 가득 채워오자


하루에 두 번 서해는 전혀 다른 얼굴을 내민다. 충남 서산시와 태안군 사이에 놓인 가로림만은 그 두 표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바다다. 육지가 항아리처럼 둥글게 감싼 지형 안쪽으로 국내 최대급 갯벌이 펼쳐지고 진흙 속에서 바지락과 낙지, 게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수도권에서 2시간 남짓. 서산의 하루는 물때를 따라 짜면 된다. 물이 빠진 시간에는 갯벌로 들어가고, 바다가 차오르는 동안에는 산자락의 옛 절과 고택을 거닐다가 물이 다시 빠질 무렵 바다로 돌아와 갈라진 길 위에 선다. 단, 서해의 간조 시각은 날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아침에 빠진 물이 다음 날엔 한낮에 빠지기도 하니 떠나기 전 국립해양조사원의 물때표로 그날의 간조 시각부터 확인해 두자. 더위가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전 서산으로 떠나 보자.

 

중리어촌체험마을에선 갯벌에서 해산물을 채집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갯벌에서 게는 물론 고둥, 조개 등 다양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필자 제공
중리어촌체험마을에선 갯벌에서 해산물을 채집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갯벌에서 게는 물론 고둥, 조개 등 다양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필자 제공

 

중리어촌체험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삼삼오오 모여 갯벌 체험을 하고 있다. 필자 제공
중리어촌체험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삼삼오오 모여 갯벌 체험을 하고 있다. 필자 제공


갯벌의 주인이 되는 시간 ‘중리어촌체험마을’

바닷물이 싹 빠져나간 갯벌에서 하루를 시작해 보자. 가로림만의 진흙 벌판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길은 지곡면 중리어촌체험마을로, 이번 여행의 중심점이다. 중왕리 주민들이 직접 꾸리는 이 마을에선 호미 한 자루만 쥐면 누구나 갯벌의 주인이 된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을 헤집어 손끝으로 조개를 더듬는 감각은 책상 앞에 묶여 있던 도시인에게 낯설고도 묘한 후련함을 준다. 운이 좋으면 바지락뿐 아니라 갯벌에 숨은 게와 고둥까지 망태기를 채운다.

갯벌까지 가는 길부터 재미있다. 마을 안내소인 행복마켓부터 체험장까지는 약 500m. 이 구간을 통통거리며 달리는 깡통열차가 인기다. 트랙터에 매달려 흔들리는 7분 남짓한 거리이지만, 아이를 데려온 가족에게는 갯벌로 들어가는 길 자체가 이미 놀이가 된다.

걷는 편을 택해도 아쉬울 게 없다. 해안을 따라 목조데크가 길게 뻗은 덕분이다. 가로림만 특산인 낙지를 본뜬 전망대에 오르면 드넓은 바다와 연안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가까운 저도, 그 너머 고파도와 웅도, 멀리 태안군 이원면의 육지까지 시야에 잡힌다. 코리아둘레길 서해랑길 77코스가 이 마을을 지나기도 한다.

갯벌에 도착했다면 본격적으로 바지락 채집을 즐길 차례. 호미질에는 요령보다 안내가 먼저다. 운영 시간에는 갯벌을 손바닥처럼 아는 마을 주민이 늘 함께한다. 바지락이 잘 나오는 자리를 짚어 주고, 처음 호미를 쥔 이의 곁을 지켜 주는 든든한 길잡이들이다.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할지 막막하다면 언제든 물어보자.

체험을 마치면 세척장에서 도구와 발의 진흙을 씻어 내면 된다. 옆 탱크에서 맑은 바닷물을 받아 가면 바지락 해감에 요긴하다. 바지락이 바닷물에서 모래를 더 잘 뱉어 내기 때문이다.

갯벌이 내주는 또 다른 선물은 가시파래, 흔히 감태라고 부르는 해초다. 수산학교 1층에서는 가시파래 가루로 초록빛을 낸 초콜릿 만들기 프로그램이 열리고, 바로 옆 식당은 가시파래를 넣은 국수를 낸다. 바다 향이 은은하게 밴 국수 한 그릇이면 갯벌에서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에 알맞다.

마을은 카라반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숙박시설을 운영하기도 한다. 하룻밤 머물며 물때가 바뀌는 바다를 온전히 누리고 싶다면 마을에 문의해 보자(041-665-9498).

 

 

가시파래국수. 필자 제공
가시파래국수. 필자 제공

 

도비산 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부석사의 아름다운 전경. 필자 제공
도비산 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부석사의 아름다운 전경. 필자 제공

 

하늘에 바위를 띄운 절 ‘부석사’

밀물이 갯벌을 숨겨 두는 동안에는 바다를 잠시 떠나도 좋다. 서산 도비산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부석사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677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경북 영주시의 부석사와 이름은 같지만 품은 이야기는 다르다. 의상을 사모한 여인 선묘가 큰 바위를 하늘에 띄워 방해꾼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앉은 가람 배치 덕에 경내는 단정하면서도 신비롭다. 극락전에는 조선 숙종 때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 안양루에 서면 멀리 서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절 뒤편으로는 만공 스님이 수행한 토굴과 마애불이 이어진다. 바다를 등지고 올라온 길인데, 산사에서 다시 바다를 만나는 셈이다.

 

 

개심사. 필자 제공
개심사. 필자 제공


오래된 고요 ‘개심사’

도비산 서쪽 품을 나와 이번에는 서산의 동쪽 상왕산 자락으로 방향을 돌린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숲길을 올라가다 보면 개심사에 도착한다.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 혜감국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충남 4대 사찰의 하나.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이름 그대로 경내는 세속의 소음을 단숨에 지워 낼 만큼 고요하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백제시대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무렵 다시 올린 건물로, 두 시대가 한 채에 포개져 있다.

개심사의 또 다른 멋은 그 곁의 심검당과 범종각에 있다. 휘고 비틀린 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세운 기둥들이 곡선의 미학을 빚어낸다. 반듯함을 버린 자리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셈이다. 봄이면 국내에서 유일하게 학계에 보고된 청벚꽃과 겹벚꽃이 뒤늦게 피어 꽃놀이의 끝자락을 장식하고, 여름에는 배롱나무가 경내를 붉게 물들인다. 경지 연못에 놓인 외나무다리는 사진을 남기기에 좋은 자리다.


서산유기방가옥. 필자 제공
서산유기방가옥. 필자 제공


수선화 대신 송림 산책 ‘서산유기방가옥’

개심사에서 멀지 않은 운산면 여미리에는 서산유기방가옥이 있다. 1919년에 지어 100년을 넘긴 한옥이다. 20세기 초 충청도 서해안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해 충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됐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무대로 이름값을 더했다. 봄마다 고택을 둘러싼 언덕을 노랗게 덮는 수선화 군락으로 유명하지만, 꽃이 진 여름에도 정취는 여전하다. 오히려 인파가 줄어 한결 고즈넉하다. 집 뒤편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으면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솔잎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땀을 식혀 준다.


황금산 코끼리바위. 필자 제공
황금산 코끼리바위. 필자 제공


코끼리를 닮은 바위 ‘황금산’

고택의 서늘한 솔숲 바람을 뒤로하고 다시 바다로 향한다. 가로림만 북쪽 대산읍의 해안이다. 독곶리에 솟은 황금산은 해발 156m의 야트막한 산으로, 서산 9경 가운데 제7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등산이라기보다 산책에 가까운 길로, 능선을 넘으면 갯벌 대신 둥근 자갈이 깔린 몽돌해변이 나타난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질 때마다 자그락자그락 둥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황금산의 진정한 주인공은 여기에 있다. 코끼리바위다. 바다를 향해 코를 내민 코끼리를 빼닮았다고 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물이 빠져나간 시간, 드러난 몽돌 벌판 위로 거대하게 솟은 자태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석양이 깔리는 웅도 노두길을 트럭이 달려가고 있다. 필자 제공
석양이 깔리는 웅도 노두길을 트럭이 달려가고 있다. 필자 제공


다시 바다가 갈라질 때 ‘웅도’

황금산에서 멀지 않은 웅도에서 가로림만은 하루의 마지막 표정을 보여 준다. 물이 빠지면 바다가 길을 연다. 웅도 본섬에서 북서쪽의 작은 섬 조도를 향해 갯벌 위로 곧게 뻗은 1.5㎞의 노두길이다. 이 길의 진가는 멀리서 바라볼 때 드러난다. 초입에 서면 갯벌을 반듯하게 가르며 뻗어 나간 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해 질 무렵이면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과 바다가 갈라진 길이 한 화면에 담긴다.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그렇게 노을이 갯벌을 붉게 적시고 나면 물때를 따라 흘러온 서산의 하루도 비로소 저문다.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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