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학의 인문계열 신입생 절반 이상을 이과 출신이 채웠다고 한다. 수도권 사립대 17곳의 입시 결과를 조사했더니 인문계열 340개 학과의 정시 모집에 이과생이 50% 이상 합격했고, 합격생 전원이 이과생인 인문계 학과도 21곳이나 됐다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선 이를 전하면서 ‘문과 침공’이라는 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대학입시에서 문과생과 이과생이 계열을 바꿔 교차 지원하는 사례는 선택과목을 달리하는 문·이과생이 한 그룹으로 표준점수를 받는 통합수능 도입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2022년 시행된 이 제도는 선택과목에 따라 서로 다른 표준점수를 받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수학과목에서 문과생이 선택하는 ‘확률과 통계’는 표준점수 최고점이 137점, 이과생이 선택한 ‘미적분’은 이보다 11점 높은 148점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성적을 받은 이과생들이 대거 상위권 대학 인문계열에 지원, 기존 문과생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혼란이 초래돼 이를 ‘문과 침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계열을 바꿔 합격한 이과 출신 인문계 학생들의 경우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진학 후에는 휴학, 자퇴, 재수 등으로 이탈하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공평한 평가를 못 받았다고 여기는 문과생들은 상실감으로 불만이고, ‘문과 침공’에 성공해 인문계열에 진학한 이과생들도 전공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공정한 입시는 물론 안정적인 대학교육 모두에 문제가 생긴 셈이다.
2028년엔 다시 선택과목을 페지하는 제도 개편으로 문제를 시정한다지만, 입시제도 개편 이후 또 다른 문제로 혼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안심되기보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우리나라 대학입시 문제의 요체는 고착된 대학 서열이 선택의 절대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대 등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전공 학문의 특성이나 지원자의 적성은 무시한 채 고착된 대학 서열을 기준으로 대학·학과를 선택함으로써 학문의 다양성과 미래 변화에 관한 성찰은 외면당하고 만다. ‘문과 침공’은 바로 이 서열 중심의 대학 지원 관행에서 표준점수의 허점을 이용한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실속(?)을 챙긴 입시전략의 성공사례인 셈이다.
서열로 고착된 일부 대학의 지위 권력이 허물어지지 않고선 백약이 무효일 뿐이다. 사회 각 분야의 전문성이 강조되고, 이에 따른 개별 학문의 의미와 중요성도 변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해야 하지만 그런 혁신의 노력은 힘을 쓸 수 없다. 사실 고등학교에서 학생의 장래희망과 적성을 고려해 문·이과를 구분하고 다양한 선택과목을 제시하는 것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서열로 주어지는 대학의 지위권력에 편승하려는 ‘문과 침공’과 같은 편법은 이런 전향적 설계를 무력화한다. 가뜩이나 저출산 문제와 맞물려 황폐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하는 모습이다.
차제에 국가의 대학입시 관여를 전면 백지화하면 어떨까. 국가는 고교 교육의 틀과 내용만 관리하고, 대학의 학생 선발절차와 방식은 전적으로 개별 대학의 자율에 맡겨 다양성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고착된 서열체제를 넘어 대학과 학문의 개성이 생생히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게 글로벌 트렌드에도 부응하는 길이 아닐까.
대부분의 정부가 출범 직후 그랬듯이 새 정부도 조만간 입시개혁안을 내놓을 것이다. 고착된 서열에 따른 간판만 찾고, 학문의 다양성과 학생의 적성은 무시하는 현재의 폐단을 혁파하는 신선한 대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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