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에 얹은 권위 벗는 순간 얻은 질서

입력 2025. 06. 30   16:08
업데이트 2025. 06. 30   16:47
0 댓글

패션의 역사 - 모자

동서 막론 왕은 ‘왕관’·무관은 ‘투구’
19세기 중산층 ‘페도라’·노동자 ‘캡’
위계 상징물 작용해 복종 유도하고
실내나 상관 앞에선 벗음으로 예 갖춰
이제는 비·해 피하거나 패션 위해 착용
이제, 벗을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일 뿐

1926년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26년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거리를 걷다 보면 모자를 쓴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간혹 햇빛을 피하려는 챙 넓은 모자나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야구모자 정도가 보일 뿐이다. 모자는 대부분 비를 막고 자외선을 가리는 실용적인 이유에서나 개인의 스타일을 위해 선택되는 정도다.

지금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모자 없이 맨머리로 살아간다. 어쩌면 더는 머리 위에 무언가를 얹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때 모자는 단순한 덮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위를 표현하는 도구였고, 신분을 시각화하는 상징이었다. 누가 어떤 모자를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한 누구인지가 한눈에 드러났다. 옷차림이 신분을 말하던 시대, 머리에 쓰는 모자 등의 액세서리는 그중에서도 신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표시였다. 그것은 그만큼 눈에 띄었고, 사람들 사이의 신분과 직업 차이를 만드는 기능을 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왕은 왕관을 썼다.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 통치 질서의 상징물이었다. 성직자나 학자들의 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형태와 색은 종교 내 서열과 권한을 구분하는 도구였고, 신과의 거리를 표시하는 매개였다. 조선의 복두(?頭: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 쓰던 관, 한자문화권에서 한때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관모 형식)는 관원이 속한 품계에 따라 모양이 달랐고, 무관은 오히려 투구와 전립을 통해 위엄을 드러냈다.

이처럼 모자는 권력과 직결된 기호였다. 말이 필요 없는 시대, 사람들은 먼저 머리 위를 바라봤다. 그것을 통해 말을 하지 않아도 권위를 감지할 수 있었고, 모자 하나로 복종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시기 모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제도였다. 사회 질서와 위계는 종종 그 조형 안에 깃들어 있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당시 유럽 군대에서 유행했던 이각모를 쓰고 있다.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국립박물관 소장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당시 유럽 군대에서 유행했던 이각모를 쓰고 있다.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국립박물관 소장

 

대관식을 치르고 왕관을 쓴 영국 국왕 찰스 3세. 연합뉴스
대관식을 치르고 왕관을 쓴 영국 국왕 찰스 3세. 연합뉴스

 

1925년 톱햇을 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박물관 소장
1925년 톱햇을 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박물관 소장



19세기 이후 세계 열강의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모자가 더는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다양한 직업과 계층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다양한 모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모자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쓰임새는 바뀌었지만 모자가 사회적 위계를 표현한다는 본질은 여전했다.

예컨대 도시의 중산층 남성들은 페도라(Fedora)나 톱햇(실크햇: 원통형으로 위가 높고 평평한 모양으로 된 챙이 있는 모자)을 썼다. 외출 시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은 예의이자 단정함의 표식이었고, 일정한 계층에 속했다는 자부심과 소속감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반면 노동자는 챙이 짧고 재질이 거친 평모(캡)를 주로 썼다. 기름때와 먼지를 막는 실용적 이유가 컸지만 동시에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구분도 함께 내포돼 있었다.

이 시기 모자는 단지 쓰는 것이 아니라 언제 벗느냐도 중요했다. 실내에 들어갈 때 모자를 벗는 행위는 단순한 생활예절이 아니라 상대방의 지위나 공간의 성격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방식이었다. 군대에서는 상관 앞에서 모자를 벗고 경례했고, 학교에서는 교장이나 교사 앞에서 모자를 벗는 것으로 복종을 표시했다. 이처럼 모자는 ‘머리에 얹는 권위’이자 ‘벗음으로 드러나는 질서’였다.

특히 제복과 함께 착용하는 모자는 조직의 질서와 권위를 상징했다. 군인, 경찰, 소방관, 철도기관사 등 공공 영역의 제복은 모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들은 모자를 통해 외부에 자신이 어떤 조직에 속해 있으며, 어떤 권한을 가졌는지를 명확히 드러냈다. 동시에 그 제복은 내부 질서를 요구하는 장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모자는 공적 권위와 그 권위를 둘러싼 복종 구조의 상징이었다.

20세기 중반, 사람들은 하나둘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 분명 누가 먼저 벗자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모자는 점점 사라졌고, 어느 순간 아무도 쓰지 않았다. 유행이 변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자가 떠난 자리에는 분명 더 큰 변화가 있었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는 이전과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산업은 팽창했고, 대중문화는 경계를 허물었다. 청년들은 넥타이를 거부했고, 기성세대는 더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페도라는 구식이 됐고, 실크햇은 오래된 사진 속에서만 남았다. 제복이 아닌 이상 굳이 머리 위에 무엇을 얹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벗을 필요가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공간과 사람 사이의 위계는 흐려졌고, 예절은 격식보다 편안함을 우선했다. 고개를 숙이거나, 모자를 벗는 일은 점차 사라졌고, 대신 인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해졌다. 그렇게 모자는 서서히 물러났다. 반발도, 작별도 없이 조용히 퇴장했다.

하지만 그 퇴장은 곧 어떤 권위의 소멸이었다. 무겁고 단정했던 것들이 하나씩 자리를 비우자 남은 것은 가볍고 유연한 일상뿐이었다. 그 안에서 모자는, 더는 필요한 물건이 아니게 됐다.

오늘날 남은 모자는 대부분 기능의 영역에 속한다. 비를 막기 위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감지 못한 날을 무심히 넘기기 위해 사람들은 모자를 쓴다. 스포츠 브랜드의 볼캡, 챙이 넓은 선캡, 방한용 니트 비니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따른 선택이다. 일부는 패션을 위해 모자를 쓴다지만 그 또한 취향의 문제일 뿐, 더는 누군가의 신분이나 위치를 증명하지 않는다.

제복을 갖춘 직업군에서는 여전히 모자가 존재한다. 경찰이나 소방, 군대, 항공 분야에서 모자는 여전히 복장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의 전달이라기보다는 제도적 형식의 연속에 가깝다. 거리에서 그들의 모자를 마주쳐도 사람들은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모자는 이제 위엄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일과 소속을 가늠하게 할 뿐이다.

한때 모자는 머리 위에서 쓰는 이와 마주한 이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분을 말해줬다. 그러나 이제 그 거리는 없다. 사람들은 같은 높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걷고, 같은 높이의 머리로 서로를 바라본다. 권위가 내려온 자리에 남은 건 각자의 얼굴, 각자의 선택이다.

이제 우리는, 더는 무엇을 써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머리 위에 얹을 것이 사라진 시대, 이제 그 빈자리는 인류 사회가 넘어선 높이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