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세비야 대성당의 콜럼버스 무덤-대항해 시대 서구 침탈의 빗장을 열다
1492년 늦은 여름날 대서양의 수평선 너머로 나아간 한 항해자의 선택은 단순한 ‘발견’의 차원을 넘어 이후 수 세기에 걸친 정복과 전쟁, 세계 질서의 재편을 촉발했다. 이 거대한 전환의 문을 연 주인공은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다.
콜럼버스가 활동한 시기는 단순한 탐험의 시대가 아니라 이후 전쟁의 방식과 범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출발점이었다. 스페인 남부 중심도시 세비야 대성당 내부에 안치된 콜럼버스의 무덤(1987년 역사지구 내 세계문화유산 지정)이야말로 이를 상징하는 역사적 증거로 손색이 없다.
콜럼버스는 어떤 인물일까? 1451년경 제노바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콜럼버스는 젊은 시절부터 지중해와 대서양 항로를 오가며 항해 경험을 쌓았다. 특히 포르투갈에서 체류하며 미지의 세계를 향한 자신의 꿈을 키웠다. 당시 유럽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이라는 인식이 널리 수용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콜럼버스가 지구의 크기를 실제보다 훨씬 작게 계산하는 착오를 범한 탓에 대양 항해를 향한 야망에 불이 붙었다. 만일 그가 정확한 지구 둘레를 알았다면 서쪽에서 아시아에 도달한다는 계획 자체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왜 하필 15세기 후반 유럽인은 신대륙으로 향했을까? 이 시기 유럽은 거대한 구조적 변화의 와중에 놓여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제국 위세 탓에 유럽 국가들은 기존의 육상 실크로드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는 곧 동양의 진기한 향신료와 귀금속을 얻으려는 유럽인의 새로운 해상교역로 개척 열망을 자극했다.
선도(先導) 국가는 긴 세월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됐던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스페인이었다. 처음 앞장선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항해왕자’ 엔히크의 진두지휘 아래 포르투갈은 15세기 중엽 이래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인도양으로 나아갈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였던 스페인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콜럼버스의 ‘서쪽 항로’ 계획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든 제안이었다. 결국 그는 1492년 1월 반도 재정복을 완료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의 후원을 받아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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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항해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중세 말 유럽이 축적해 온 다양한 유·무형 인프라가 존재했다. 우선 조선 기술상으로 당시 유행한 카라벨이라 불린 소형 범선은 대서양 항해에 적합한 기동성과 내구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나침반과 아스트롤라베 같은 항해 도구의 발전은 망망대해에서도 방향과 위도의 정확한 측정을 가능케 했다.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로 세밀한 해도 작성의 길이 열리면서 항해상 직면하게 될 불확실성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등장은 대규모 원정에 필요한 자본의 투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주체도 이슬람으로부터 이베리아반도를 갓 수복한 이사벨 여왕의 통일 왕국이었다. 대서양 서쪽 항해를 외치며 이베리아반도를 떠돌던 콜럼버스는 마침내 1491년 이사벨 여왕과 대면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여왕은 얼마 후 마음을 바꿔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을 승인했다.
마침내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 남부 팔로스항구에서 역사적인 항해 길에 올랐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스페인을 떠난 지 두 달이 훌쩍 지난 10월 12일 새벽 콜럼버스 일행은 그토록 고대한 육지를 발견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인도의 서쪽에 도착했다고 믿었지만 그곳은 유럽인에게는 생소한 미지의 대륙이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자체가 구세계와 신세계 간 충돌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명백한 전쟁사적 전환을 의미했다. 콜럼버스 항해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메리카대륙에서 원주민을 상대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스테카제국 정복(1519~1521)과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제국 정복(1530년경)은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기존 유럽 국가 간 전쟁이 상대적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전개된 데 비해 이제 전쟁은 대양을 넘어 대륙 간 규모로 확대됐다. 당연히 해군력이 국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고, 대서양은 새로운 전쟁의 무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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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5월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자택에서 사망한 콜럼버스의 유해는 여러 차례 이장되는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1898년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됐다. 세비야에 터를 잡은 이유는 이 도시가 16세기 이후 스페인제국의 대서양 교역과 식민 통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콜럼버스를 이곳에 안치하는 일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스페인제국의 과거 영광을 상징적으로 재확인하는 행위였다. 게다가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성당 가운데 하나로, 스페인 가톨릭 왕권의 위엄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대성당 내부의 콜럼버스 무덤 역시 단순한 관(棺)이 아니라 강력한 상징성을 지닌 조형물이다. 구조상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중앙의 관과 이를 떠받치고 있는 네 인물상으로, 이들은 과거 스페인의 주요 왕국(카스티야·아라곤·나바라·레온)을 표상한다. 특히 네 인물은 단순히 정적인 지지 구조가 아니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동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로 인해 구조물 전체가 단순한 수직적 기념비를 넘어 전진하는 행렬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직사각형 형태인 관은 길이 약 1.8~2m, 전체 높이 약 3.5~4m로 청동과 일부 도금 처리로 제작됐다. 관 표면에는 장식적 문양과 문장(紋章)이 부조 형태로 표현돼 ‘스페인 왕국 전체’를 대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
콜럼버스 이후를 흔히 ‘대항해 시대’로 명명한다. 하지만 군사사적 관점에서는 ‘전쟁의 세계화’가 개막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식민지 획득을 위해 경쟁했다. 이는 곧 글로벌 차원의 군사 충돌로 이어졌다. 특히 금·은의 대량 유입은 유럽 국가들의 군사비 지출을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식민지에서의 폭력과 착취는 단순한 경제활동을 넘어 구조화된 군사적 지배 형태에 가까웠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는 우연과 필연이 교차한 사건이었다. 그가 결행한 대서양 항해의 의미는 단순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의 공간을 세계로 확장하고 앞선 유럽과 낙후된 신대륙 간 충돌과 지배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출현시켰다.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질서와 문화유산 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현재 세비야 대성당에 누워 있는 콜럼버스가 과연 자신의 항해가 이러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이라도 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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