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남은 사람... 끝내 기억될 이름

입력 2026. 04. 30   16:42
업데이트 2026. 05. 0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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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라스트 풀 메저(2019)

감독: 토드 로빈슨
출연: 서배스천 스탠(스콧 허프먼), 제러미 어빈(윌리엄 피첸바거), 새뮤얼 L. 잭슨(빌리 타코다), 에드 해리스(레이 모트), 윌리엄 허트(톰 툴리), 크리스토퍼 플러머(피첸바거 아버지), 피터 폰다(지미 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이 스러져야 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중략) 손실된 것·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의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전쟁의 슬픔』, 바오 닌 지음, 아시아 펴냄

베트남전 윌리엄 피첸바거의 실화
영화 제목 ‘라스트 풀 메저(The Last Full Measure)’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따왔다. “명예롭게 스러진 이들로부터 우리는 그들이 헌신의 마지막 전부를 바쳤던 그 대의를 향해 더 큰 헌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렇다. 한 젊은 항공병의 죽음을, 비록 시간은 지났지만 나라는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1966년 4월 11일 베트남 사이공(현 호찌민) 동쪽 약 68㎞ 지점의 밀림. 전선이 따로 없었던 베트남전쟁에서 그곳은 베트콩 5사단의 핵심 보급기지가 밀집한 적의 심장부였다. 미 육군1보병사단 C중대 134명은 오퍼레이션 애빌린(Operation Abilene) 작전 수행 중 베트콩 D-800 대대 약 500명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훗날 논란이 됐지만 C중대는 1보병사단장 윌리엄 드퓨 소장이 베트콩 D-800 대대를 유인하기 위해 고의로 고립시킨 ‘미끼’ 부대였다.

3중 수관(樹冠)으로 뒤덮인 밀림에서 육군 헬기는 착륙이 불가능했다. 구조 요청을 받은 공군 HH-43 허스키 헬기 2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공중에서 정지비행을 하며 21세 공군 항공병 윌리엄 피첸바거가 케이블을 타고 약 30m, 아파트 10층 높이를 내려와 전투 한복판에 발을 디뎠다.

두 헬기는 3차례씩 왕복하며 12명을 후송했다. 마지막 헬기가 들어올 때였다. 조종사가 피첸바거에게 탑승을 지시하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직 바닥에 부상병이 남아 있었다. 헬기는 적의 총탄을 맞고 간신히 전장을 벗어났다. 피첸바거는 그렇게 스스로 남는 쪽을 택했다. 이후 그는 탄약을 모아 분배하고, M16을 들고 전투에 합류했다. 3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부상병을 돌봤다. 그날 밤 그는 전사했다.

C중대의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 71명. 사상률 80%였다. 피첸바거는 그 전투에서 60명 이상의 병사를 살렸다. 공군사령부는 즉각 명예훈장(Medal of Honor) 추천서를 올렸으나 서류는 사라졌다. 정확히는 격하됐다.

‘충분한 증거 없음’을 이유로 육군 장성의 결정에 의해 훈장은 공군 십자훈장(Air Force Cross)으로 낮아졌고, 이후 피첸바거의 공적은 묻혔다.

나라는 늦었지만 결국 기억한다
영화는 32년 뒤인 1998년부터 시작한다. 국방부 직원 스콧 허프먼(서배스천 스탠 분)은 자신의 경력 관리에 바쁜 엘리트 관료다. 상사가 그에게 떠넘긴 임무는 피첸바거의 훈장 재심사 청원서 검토. 어차피 부결될 민원 처리 정도로 여긴 그가 생존 병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영화는 전장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사들은 제각각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 빌리 타코다(새뮤얼 L. 잭슨 분)는 술로, 레이 모트(에드 해리스 분)는 침묵으로, 지미 버(피터 폰다 분)는 반전 히피의 삶으로 ‘그날’을 지우고 있다. 피첸바거의 파트너였던 톰 툴리(윌리엄 허트 분)는 32년 동안 혼자 재심사를 청원해 온 사람이다. 그는 허프먼에게 말한다. “그 애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어렸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았다.”

허프먼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군 내부의 관료주의, 공군과 육군의 이해 충돌, 의회의 무관심. 피첸바거의 명예훈장이 불발된 것은 망각이 아니라 묵살이다. 허프먼은 자신의 경력을 걸고 이 사실을 공론화하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절정은 마침내 열린 명예훈장 수여식이다. 늙어 가는 피첸바거의 부모(크리스토퍼 플러머·다이앤 래드 분), 그날의 생존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공군 장관은 훈장을 수여한 뒤 객석을 향해 말한다. “이것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힘입니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실제 생존 병사들의 증언이 흐른다.

노장 배우들의 앙상블은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새뮤얼 L. 잭슨, 에드 해리스, 윌리엄 허트,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한 화면에 모인다. 이 작품은 피터 폰다의 유작이다.

2000년 12월 빌 클린턴 대통령이 피첸바거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한다. 전투로부터 34년 만의 일이다. 그의 이름은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추모비 6E구역 102번째 줄에 새겨져 있다. 링컨의 말처럼 나라는 늦었지만 결국 그 이름을 기억한다.

‘골든아워’를 만든 사람들, 더스트오프
베트남전쟁 의무후송 헬기의 콜사인은 ‘더스트오프(Dustoff)’였다. 먼지가 날린다는 뜻의 이 호출부호는 베트남전쟁에서 공중의무후송(MEDEVAC) 헬기의 보통명사가 됐다. 임무 원칙은 단 한 문장이었다. “주저 없이, 타협 없이 부상병을 꺼내라.” 

더스트오프의 역사는 1962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57의무파견대(헬기 앰뷸런스)가 UH-1 휴이 헬기 5대를 이끌고 베트남에 투입되면서 시작됐다. 이전까지 전장 의무후송은 도로와 차량에 의존했지만, 베트남의 울창한 밀림과 게릴라전은 지상 후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헬기가 유일한 답이었다. 더스트오프 크루는 파일럿 2명, 의무병 1명, 정비병 1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불문율을 하나 만들었다. ‘요청이 오면 무조건 간다’. 착륙지점이 교전 중이어도, 야간이어도, 기상이 나빠도 출동했다.

규정상 야간 임무는 금지였지만 파일럿들은 무릎 사이에 손전등을 끼우고 계기판을 보며 날았다. 54의무파견대 지휘관 팻 브레이디 대위는 출동 요청을 받으면 2분 안에 이륙하도록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결과는 숫자로 남았다. 베트남전쟁에서 더스트오프 크루가 수행한 임무는 약 50만 건. 1962년 5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군과 베트남군, 심지어 적군인 베트콩까지 포함해 9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후송했다.

부상병이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33분. ‘골든아워(Golden Hour)’라는 개념, 즉 부상 후 한 시간 안에 수술받아야 생존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원칙은 더스트오프의 현장 경험에서 나왔다. 오늘날 전 세계 민간 응급의료체계의 ‘헬기 응급후송’과 ‘외상센터 황금시간대’ 기준은 모두 이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더스트오프 크루의 항공기 손실률은 다른 전투헬기 임무보다 3배 이상 높았다. 그래도 그들은 날았다. 부상병들은 더스트오프의 소리가 들리면 살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실제로 생존율을 높였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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