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세월 덮인 옛터엔 나라 잃은 설움 가고 꼿꼿한 기개만 남았네

입력 2025. 08. 12   16:40
업데이트 2025. 08. 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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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세계 속 독립운동 거점 ⑥ 중국 동북

독립운동 기반지이자 무장 투쟁 중심지
신흥무관학교 터 옥수수 밭으로 변하고
지린 의열단 결성지 새 건물 들어섰지만
우뚝 솟은 봉오동·청산리전투 기념비
표지석으로 남은 서전서숙·천보산 전투지…
민족의식 고취·독립군 양성 의지 고스란히

중국은 우리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나라다. 그중에서도 지린(吉林·길림), 옌지(延吉·연길), 룽징(龍井·용정), 훈춘(琿春·혼춘) 등 동북지역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기반을 마련한 핵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독립운동의 기지이자 무장 독립투쟁의 중심지였던 것. 이곳에서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직접 통치를 피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독립군과 지도자를 배출했다. 서현우 기자/사진·도움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룽징 3·13 독립만세시위 기념비

북간도 지역 한인들은 한반도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후 3·13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출했다. 활동 기반을 다지는 데는 학생과 교사의 역할이 컸다.

1919년 3월 13일 서전벌에는 수많은 한인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서전벌은 지금의 지린성 옌볜(延邊·연변) 조선족자치주 일대의 평야다. 독립운동가 계봉우는 ‘독립신문’에 당시 참여 인원이 3만 명 이상이라고 했다. 만세운동에서 한인들은 조선독립축하회를 열고 행렬을 지었다. 이들은 ‘대한독립’ ‘정의인도’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워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로 행진했다. 진입을 막는 중국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해 17명이 순국했다. 기념비는 2009년 세워졌다.

 

서전서숙 옛터 표지석.
서전서숙 옛터 표지석.



룽징 서전서숙 터 

서전서숙은 1906년 10월경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이후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해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에 정착했다. 이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룽징에 서전서숙을 건립했다. 운영 경비는 그가 서울을 떠날 때 집을 팔면서 마련한 자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돼 감시·방해가 본격화하고 운영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907년 9~10월경 폐교됐다. 현재 ‘룽징(용정)실험소학교’ 운동장 일대가 터로 추정되고 있다.


명동학교 운영 당시 학생들의 기념사진과 현재 남아 있는 명동학교 모습.
명동학교 운영 당시 학생들의 기념사진과 현재 남아 있는 명동학교 모습.



룽징 명동학교 


명동학교는 인재 양성을 위해 만든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학교다. 명동학교는 1908년 4월 명동서숙으로 시작했고, 명동서숙은 1907년 폐교된 서전서숙을 계승했다. 명동학교라는 이름은 1909년 4월부터 쓰였다. 북간도 한인 교육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910년 중학부, 1911년 여학부가 설치됐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윤동주가 이곳을 졸업했다. 명동학교는 룽징시에서 복원을 진행해 2010년 8월 완공됐다. 2011년에는 독립기념관의 지원을 받아 명동촌역사기념관으로 꾸몄다.


룽징 고마령 참변지 

1925년 국내 진공작전 회의를 하던 독립운동단체 참의부 간부들이 일제의 습격을 받아 순국했던 곳이다. 1924년 5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압록강 순시 중 독립군에 공격당하자 일제는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1925년 3월 16일 참의부는 지안(集安·집안)현 고마령 일대에서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일제 경찰의 기습을 받아 대거 전사하는 참변을 겪었다. 고마령 산골짜기에는 석축과 벽 등에 당시 흔적이 남아 있다.


류허 신흥강습소 터

1910년 경술국치 전후 다수 독립지사가 서간도 지역에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1911년 5월경 지린성 류허(柳河·유하)현에 경학사가 조직됐다. 경학사의 첫 사업은 무관학교 건립이었다. 이에 이회영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이장녕·이관직 등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과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민회의 ‘신(新)’과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의 의미인 ‘흥(興)’을 합했다. 이회영의 6형제와 이상룡·김동삼 등 명망가들에 의해 설립·운영됐는데, 이들은 전 재산을 신흥강습소에 바쳤다. 초기 학생은 40여 명이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전경.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전경.



류허 신흥무관학교 터(고산자)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의 후신이다. 처음 합니하 지역에 세워졌고, 이후 고산자 일대로 확장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찾는 한인 청년이 늘자 합니하 학교가 포화상태가 됐고, 고산자에 새로 교사를 지어 정식 본교로 개교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중등교육과 군사교육을 병행하며 수많은 독립군을 배출했다. 현재 터는 옥수수밭으로 변했고,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봉오동전투 현황도.
봉오동전투 현황도.



봉오동전투 기념비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1920년 6월 7일 독립군과 일본군 간에 봉오동전투가 발발했다. 박승길이 지휘하는 30명 정도의 독립군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북 종성으로 진입해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귀환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추격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이에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독립군은 일본군 추격대를 기습해 승리를 거뒀다. 충격에 휩싸인 일본군은 보병중대와 기관총소대 등을 동원한 대규모 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고, 독립군과 일본군은 지린성 왕칭(汪淸·왕청)현 봉오동에서 대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는 ‘독립신문’에 봉오동전투 전황과 관련해 “적의 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요. 아군의 사망자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이 많다”고 밝혔다.


왕칭 대한국민회 본부 터

대한국민회는 1919년 4월 조직된 자치기구 겸 독립운동단체다. 자치 활동과 독립운동을 위해 행정과 군사 두 조직을 뒀다. 행정조직은 133개 지회를 편성했다.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 등을 통해 무장 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봉오동전투가 대표적으로,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들과 힘을 모아 봉오동전투에서 승전했다. 당시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은 헐리고 현재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왕칭 북로군정서 총재부 터(덕원리) 

북로군정서는 1911년 3월 북간도의 대종교 인사들이 조직한 중광단에서 시작됐다. 3·1운동 이후 중광단은 대한정의단을 결성했고, 같은 해 군정부로 이름을 바꿨다. 이어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정례 국무회의에서 군정부를 군정서로 다시 개칭하기로 결정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원 명령으로 ‘대한군정서’가 됐다. 다만 ‘북로군정서’로 더 알려졌다. 총재부와 사령부로 구성됐으며, 총재부 총재 서일과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총재부가 있던 덕원리는 일본군이 여러 차례 마을을 수색·탄압하는 바람에 없어져 그 흔적도 사라졌다.


윤동주 시인 묘.
윤동주 시인 묘.



지린 윤동주 묘

윤동주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활동한 저항시인이다. 지금의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도시샤대 영문과에서 학업을 이어 갔다. 재학 때 유학생들과 민족독립사상을 선양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옥중 순국했다. 윤동주 시인의 묘는 룽징시 공동묘지에 있다.

 

천보산 전적지비.
천보산 전적지비.



지린 천보산 전투지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한 부대는 1920년 10월 24일 오전 두 차례에 걸쳐 지린성 룽징시 천보산 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던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했다. 또한 홍범도 연합부대 중 한 부대는 이튿날 새벽 식량 조달을 위해 천보산 부근에 나갔다가 일본군을 습격해 큰 피해를 줬다. 현재 천보산 마을 입구에 당시 전투장소를 알려 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청산리항일대첩 기념비.
청산리항일대첩 기념비.



청산리전투 기념비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대첩 8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기념비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26일 지린성 허룽(和龍·화룡)시 청산리 일대에서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합심, 백운평전투를 비롯해 10여 차례 일본군과 싸운 전투다. 2001년 ‘청산리항일전적비’가 있던 산의 능선에 화강암으로 만든 ‘청산리항일대첩 기념비’를 세웠다. 뒷면에는 건립 취지문과 경위가 새겨져 있다.


지린 의열단 결성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체 의열단이 창립된 곳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선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19년 11월 김원봉을 비롯해 이종암, 윤세주, 강세우 등 13명이 모여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이 결성됐던 옛 건물은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훈춘 3·1 독립만세운동지

1919년 3월 20일 지린성 훈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날 훈춘에선 훈춘대한국민회의 이명순, 황병길, 노종환 등이 주도해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참석한 한인은 2600여 명이었다. 훈춘은 연해주와 북간도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 만주와 연해주의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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