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스타를 만나다 - 음악으로 되돌아온 K팝의 가치
OTT 흥행 넘어 전 세계 음원 돌풍
극중 아이돌 곡부터 OST 앨범까지
미국·영국 주요 차트서 1·2위 다퉈
할리우드·이민자가 바라보는 K팝
뮤지컬 넘버 같은 과장된 표현에도
최근 매끈해진 K팝과 다른 매력 뽐내
“마시고 마셔 봐도 성에 차지 않아.”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가실 줄을 모른다. 지난 6월 24일 본 코너에서 작품을 소개한 이후 꾸준히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며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던 작품이 이제 명실상부 전 세계 화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음악과 춤으로 악귀를 정화하는 3인조 K팝 걸그룹 헌트릭스와 이에 맞서는 5인조 지하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가 펼치는 흥미로운 액션과 감동의 뮤지컬이 종주국 한국을 넘어 31개국 넷플릭스 시청자들의 취향을 사로잡았다. 설정 자체로 두근거리는 캐릭터, 4년간의 제작 기간 치밀하다 못해 촘촘하게 K팝과 한국을 재현한 디테일, 작품에 참여한 제작진의 비화가 소셜 미디어에 끝없이 화자되며 작품에 무한한 영혼을 공급하고 있다.
놀라운 건 음악의 성공이다. 영화 흥행이 삽입곡의 흥행을 견인하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미국 내 곡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는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 차트에서의 활약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사자 보이즈의 ‘유어 아이돌(Your Idol)’은 미국 스포티파이 데일리 차트 1위를 차지하더니 지난주 빌보드 핫 100 차트 77위에 진입했다. BTS도, 블랙핑크도 솔로 멤버로는 달성했으나 그룹 단위로는 누리지 못한 인기를 가상의 K팝 아이돌이 최초로 차지한 것이다. 공개 초반 작품을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소다 팝(Soda Pop)’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헌트릭스도 질 수 없다. ‘골든(Golden)’ ‘하우 잇츠 던(How It’s Done)’이 스포티파이 차트 정상을 놓고 다툰다. 미국에서는 사자 보이즈가 더 지지를 받지만 영국에서는 헌트릭스가 우세하다. 한국도 그렇다. 뒤늦게 입소문을 타고 듣는 귀를 점령한 ‘골든’은 유튜브 뮤직 차트 및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 차트에서 정상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팬들은 작중 음악을 통해 악귀의 출몰을 막는 ‘혼문’의 개념을 가져와 차트 성적에 따라 ‘혼문 찢어지는 중’ ‘혼문 지켰다’며 흥행을 만끽하고 있다.
총 12곡이 수록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이번주 미국 빌보드 200 차트 2위에 올랐다. K팝 그룹이 글로벌 시장에서 거둔 성과를 모조리 경신할 기세다. 현실의 케이팝 그룹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노래에 도전하고 춤을 추는 콘텐츠가 더는 낯설지 않다. 블랙핑크가 오랜만에 그룹 단위로 발표한 신곡 ‘점프’가 없었다면 주인공은 단연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음악은 전형적이다. K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댄스 팝의 속성에 충실하다. 감독 매기 강과 크리스 아펠한스가 서울의 일상적인 풍경을 환상적으로 풀어내며 한의원, 식사 예절, 전통 민화, 개인의 성격 등 한국인보다도 더욱 한국스러운 작품에 집중한 만큼 음악 역시 K팝의 공식을 따른다. 걸 크러시 콘셉트의 케이팝 걸그룹 곡을 연상케 하는 ‘하우 잇츠 던’과 ‘테이크다운’ ‘유어 아이돌’은 K팝 뮤지컬이라는 극의 속성에 부합하는 이야기곡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3인조 걸 그룹 헌트릭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청량한 콘셉트로 데뷔해 치명적인 유혹을 건네며 성장하는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를 음악으로 묘사하고 소개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K팝 ‘선배’ 그룹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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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베테랑 제작자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로제, 올데이 프로젝트, 미야오, 전소미 등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테디의 더블랙레이블 소속 프로듀서 24, 아이디오, 도민석, 빈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BTS의 글로벌 히트곡 ‘버터’와 ‘퍼미션 투 댄스’를 만든 제나 앤드루스 & 스티븐 커크 듀오도 ‘유어 아이돌’을 제작했다.
가창 명단은 더욱 화려하다.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앤드류 최와 10년 이상의 연습생 생활을 거쳐 솔로 가수로 활동 중인 김은재(활동명 EJAE)가 사자 보이즈의 진우와 헌트릭스의 루미 역을 맡았다. 오드리 누나, 넥웨이브, 대니 정, 레이 아미, 유키스의 케빈 등 한국계 미국인 가수들의 참여 역시 곡에 생명을 불어넣은 요소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가운데 현재 활동 중인 K팝 가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트와이스의 정연, 지효, 채영이 참여한 ‘테이크다운(Takedown)’이 전부다.
바로 이 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음악이 차별화된다. 분명 K팝이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K팝이다. 아이브의 ‘아이 엠(I AM)’을 떠올리게 하는 리듬의 ‘골든’은 3옥타브 A의 파워 보컬을 요구한다. 극중 와이어에 매달려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며 고난도의 안무를 소화하는 헌트릭스의 루미조차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곡으로 닿을 수 없는 완벽한 이상향을 암시한다.
‘소다 팝’의 디스코 댄스 팝은 2020년대 BTS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를 중심으로 K팝이 미국 시장을 겨냥해 내놓은 싱글을 연상케 한다. ‘소다 팝’ 직전 등장하는 엑소의 ‘러브 미 라이트(Love Me Right)’와 멜로망스의 ‘사랑인가 봐’가 완연한 K팝이라면 이를 모나지 않게 가공한 ‘소다 팝’은 저승의 우두머리 귀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자 보이즈의 정체를 생각해 봤을 때 그룹의 역설을 상징하려고 일부러 다듬어진 곡이다.
할리우드가 바라보는 K팝, 이민자로서 바라보는 K팝은 오늘날 K팝과는 분명 다른 핵심을 짚고 있다.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는 선명한 자신의 서사와 자기 증명, 혹은 정반대로 십대들의 취향에 철저히 봉사하는 우상으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우 잇츠 던’과 ‘골든’이 전자에 해당한다.
후자의 대표 주자는 “지금 네겐 나뿐이야, 난 너의 아이돌”이라고 외치는 ‘유어 아이돌’이다. 뮤지컬 넘버답게 다소 과장된 면이 있고 투박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오늘날 매끈해진 K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 유행을 빠르게 섭렵해 내놓는 재빠른 가공, 지치더라도 멈출 수 없는 도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안도와 기쁨이다. 종주국에서는 위기설이 돌고 대중에게서 멀어진 K팝의 가치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2차 가공작에 살아 숨쉰다. 듣고 즐기면서 곱씹어볼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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