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파도 온몸으로 맞아도 과묵한 그 섬엔...사계절 지지 않는 꽃이 핀다

입력 2025. 03. 19   17:29
업데이트 2025. 03. 1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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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박보검, 웃으면서 울리는 시대의 얼굴

보호본능 자극하는 얼굴·눈물 연기로 ‘국민남친’ 등극
청춘의 초상다운 상큼·발랄한 매력 있지만
가장의 무게 짊어진 ‘폭싹…’의 관식 제 옷처럼 맞는 건
눈빛에 담고 있는 쓸쓸한 애수…그 깊이감 덕분



“광례 딸을 왜 걱정해? 옆에 무쇠 하나 붙어신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시장에 나온 해녀들은 애순(아이유) 옆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는 관식(박보검)을 보며 그렇게 말한다. 문학소녀 애순은 애써 밭을 일궈 양배추를 재배했지만, 그걸 시장통에서 파는 데는 젬병이다. “양배추 달아요”라는 말 한마디를 꺼내기 어려워한다. 옆에서 생선을 파는 관식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 말을 대신한다. 어려서부터 애순 옆에 딱 붙어 삶의 고단함을 같이 버텨 주고 함께 울어 주던 관식이다. 애순의 엄마가 스물아홉이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을 때 이제 열 살이었던 애순 옆에 딱 버티고 서서 “울면 배 꺼져. 먹으면서 울어”라고 말해 주던 관식이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관식이란 인물은 과묵하다. 거의 말이 없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무쇠’라는 표현이 딱 맞는 그런 인물. 그래서인지 이 인물을 연기하는 박보검의 말보다 표정 연기가 절대적이다. 무쇠라는 표현처럼 박보검은 무표정 속에 감정을 담는다. 그 무쇠가 가족을 위한 헌신으로 닳아 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애순 옆에 딱 붙어 바보같이 웃으며 행복해하는 관식의 모습은 짠한 느낌을 준다. 박보검의 연기가 ‘폭싹 속았수다’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건 이 무쇠 같은 캐릭터가 원래 그가 갖고 있던 애수를 제대로 끄집어내 줘서다. 박보검은 웃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드러낼 때 보는 이들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배우다. ‘응답하라 1988’에서 해맑게 “넌 내 손바닥 안에 있어. 너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뭐 있냐?”고 말하는 덕선(혜리)에게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라고 얘기하는 택이의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박보검의 얼굴엔 말보다 눈빛이 전하는 진짜 속내가 전해질 때가 있다.

2011년 영화 ‘블라인드’로 데뷔한 박보검은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보적인 비주얼로 연기자가 어울린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연기의 길로 들어섰다. ‘차형사’ ‘끝까지 간다’ 등의 영화와 ‘각시탈’ ‘원더풀 마마’ 같은 드라마로 필모를 쌓아 오다가 2014년 영화 ‘명량’에서 왜군에게 맞서다 목숨을 잃은 장수의 아들 수봉 역할로 주목받았다. 아버지를 잃고 울부짖는 눈물 연기였다. 해전 끝에 이순신(최민식 분)에게 토란을 나눠 주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토란소년’이란 애칭도 얻었다. 이때부터 박보검은 순수한 얼굴로 보는 이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눈물 연기’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응답하라 1988’의 천재 바둑기사 최택 역할은 바로 그런 박보검의 얼굴을 제대로 꺼내 놓은 작품으로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았다. 또한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사극에서는 까칠한 카리스마와 따뜻함을 동시에 가진 왕세자 이영 역할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이 사극은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박보검의 해외 팬덤을 만들기도 했다. ‘남자친구’에서는 송혜교와 멜로 연기 합을 맞추며 감수성이 예민한 배려 깊은 청년 김진혁 역할로 ‘국민 남자친구’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박보검을 청춘의 초상으로 세워 준 작품은 ‘청춘기록’이었다. 이 작품에서 박보검은 모델에서 배우로 성장하는 청춘 사혜준 역할로 흙수저지만 그런 배경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았다. 배우로 성공하는 인물이지만, 그 성공만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 줌으로써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홀로 울 수 있는 방’이 있는 것에 행복하다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앞에서도 무심한 듯 보이는 박보검 특유의 얼굴이 화려함 이면의 쓸쓸함 같은 것을 제대로 포착해 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의 박보검은 그 청춘의 초상에서 성장해 성숙한 중년의 면모까지 더하는 변화를 보여 준다. 박보검이 이 작품에서 연기하는 관식은 ‘폭싹 속았수다’(‘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라는 제목에 걸맞은 삶의 고단한 노동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섬 놈’에게는 절대 시집가지 않는다는 애순 옆에 딱 붙어 묵묵하게 비빌 언덕이 돼 주는 이 인물은 가족을 부양하고자 무쇠 같던 몸이 닳아 버릴 정도로 일하는 그 시대 가장의 얼굴을 상징한다. 무심해 보이고, 말주변도 없어 보이지만 한 발 물러나 뒤편에서 가족을 지지하는 가장의 얼굴 말이다. 거기엔 웃고 있어도 눈물이 숨겨져 있는 당대의 어른이 갖고 있던 소회가 묻어난다. 젊은 시절 유채꽃밭에서 애순에게 다짜고짜 뽀뽀하며 마음을 전하는 관식의 풋풋함과 순수함도 박보검이라는 배우를 통해 더 상큼하고 발랄한 느낌을 전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배우가 가진 진짜 매력은 그 발랄함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애수 같은 것에서 나온다. 누구나 한 번 보면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드는 쓸쓸함이 박보검의 눈에 담겨 있다

순애보라는 표현은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자주 표현되지만, 그 변함없는 마음속에는 그 사람이 가진 우직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순애보에는 남녀 간의 애정을 넘어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폭싹 속았수다’는 애순과 관식의 사랑을 담은 드라마이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휴머니즘이 압권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웃으면서 울리는 박보검이란 배우가 당대를 살았던 어른들의 얼굴에 깊이감을 부여한 건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눈빛 연기 때문이 아닐까. 청춘의 아이콘이면서 한 시대의 얼굴을 표현해 낸 이 배우가 앞으로 그려 갈 성장이 기대되는 건 이런 깊이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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