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기 사라지고, 숨소리 거칠어도…한 걸음 또 한 걸음 ‘길의 주인’이 되다

입력 2024. 12. 30   16:55
업데이트 2024. 12. 3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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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31보병사단 훈련병 야간행군 ‘뜨거운 현장’

포기 않는 ‘자신과의 싸움’
훈련 5주 차 94명, 20㎏ 군장 메고 야간행군
깊은 밤 추위에도 묵묵히…‘전사 인식표’ 목에 걸어
“한계 느껴보고 싶다” 30㎞ 장거리 도전 성공하기도
끝내 해낸 ‘함께하는 도전’ 
“발 끌지 마, 물집 잡힌다” “끝까지 가보자”
교관·조교 격려에 힘내고 동기 의지하며 완주
최상의 전투력 발휘 중점 교육 등 사단 노력 빛나


조선 영조 때 학자 신경준은 도로와 산천을 정리하며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걸어가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작가 김훈은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신경준의 글에 살을 붙인다. “‘그 위를 걸어가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말은 ‘걸어가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들렸고, ‘걸어갈 때만 주인이다’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걷기, 곧 행군이 숙명인 군인들에게 이 문장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김훈의 문장을 변주하면 행군로는 장병들이 걸어가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장병들은 행군로를 걸어갈 때만 그 길과 남은 군 생활의 주인이 된다. 이제 막 군 생활을 시작한 훈련병들도 같은 생각일까. 2024년 끝자락인 지난 23~24일, 군 생활의 출발선에 선 육군31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 훈련병 야간행군에 동참해 그들의 각오를 엿봤다. 글=최한영/사진=김병문 기자

 

육군31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 1중대 훈련병들이 훈련 5주 차인 지난 23~24일 야간행군에 나서고 있다.
육군31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 1중대 훈련병들이 훈련 5주 차인 지난 23~24일 야간행군에 나서고 있다.



20㎏ 군장 무게 이겨내며 행군 나서

23일 저녁 6시30분, 저녁 식사를 마친 1중대 훈련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했다. 지난달 26일 입대해 훈련 5주 차에 들어선 훈련병들에게 어느새 군인다운 절도 있는 동작, 패기 있는 목소리가 녹아 있었다. 20㎏ 군장과 각종 장구류를 메고, 소총까지 들고 있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출정 신고! 충성! 훈련병 XXX 외 93명은 행군 출정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교관은 행군을 앞둔 훈련병들에게 자신감과 전우애를 불어넣었다. “누구는 행군을 두고 스스로와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사실 행군은 함께하는 거다. 여러분의 동기, 교관들이 함께할 거다. 한계를 이겨내며 잘해주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완주했을 때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자부심, 남은 군 생활의 자신감도 얻을 거다. 함께 도전하며 극복하자.”

교관의 구령에 따라 5초간 함성을 내지른 훈련병들이 20㎞ 행군을 시작했다. 훈련병들과 같은 20㎏ 군장을 멘 기자도 대열 중간에 섰다. 행군 시작부터 어깨를 짓누르는 군장 무게를 이겨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단 내 행군로는 아스팔트 길과 흙길, 자갈길이 뒤섞였다. 특히 나뭇가지와 낙엽 등이 덮인 흙길을 걸을 때는 여차하면 미끄러질 수 있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대열 중간마다 교관·조교들이 서서 훈련병들의 발걸음을 세세히 살폈다. “발 끌지 마. 물집 잡힌다” “지면 잘 봐. 땅이 안 좋아서 잘못하면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진다” “앞을 잘 보고 걸어. 오르막길에서는 몸을 앞으로 숙여야 해.” 모두가 기자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1시간10분 넘게 걸어서야 첫 휴식이 주어졌다. 휴식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군장을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은 기자와 달리, 훈련병들은 끄떡없어 보였다. 기자가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바’를 먹으며 체력을 비축하는 동안, 훈련병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남은 행군을 무사히 끝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처음이 제일 힘들어. 이 순간만 버티면 괜찮아진다. 옆에 있는 동기들과 함께하면 할 수 있지?” “네!” 교관의 격려와 훈련병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울려 퍼졌다.

10㎞를 걸은 후 40분간 대휴식이 주어졌다. 사단은 훈련병들에게 컵라면, 탄산음료, 치킨너깃 등을 제공했다. 기자도 나란히 앉아 순식간에 음식들을 해치웠다. 휴식시간은 언제나 짧은 법이다. 걸을 때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쉴 때는 쏜살같이 흘러갔다.

밤이 깊어지고 기온이 내려갔지만, 긴장감에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훈련병들은 묵묵히 발을 옮겼다. 옆에 선 교관·조교들의 눈은 더욱 매서워졌다. 간격이 벌어지거나, 걸음걸이가 이상한 훈련병을 바로 발견해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힘들어하는 훈련병을 격려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다했어. 다 왔는데 포기할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아깝잖아. 마지막이 중요한 거야.”

훈련병들도 의지를 불태웠다. 기자 옆에서 걷던 훈련병은 다리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열외는 안 할 겁니다”라며 완주를 다짐했다. 바로 뒤 훈련병이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열에서 잠시 이탈했던 한 훈련병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조교는 “끝까지 가보자”며 격려했다.


야간행군 중인 훈련병들.
야간행군 중인 훈련병들.

 

훈련병들이 휴식시간을 이용해 방탄헬멧 안에 찬 습기를 말리고 있다.
훈련병들이 휴식시간을 이용해 방탄헬멧 안에 찬 습기를 말리고 있다.

 

훈련병들이 휴식 도중 발에 물집이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투화와 양말을 벗은 모습.
훈련병들이 휴식 도중 발에 물집이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투화와 양말을 벗은 모습.



희망자 받아 장거리 행군 추가 실시

24일 자정, 교관의 “군장 내려!” 외침과 함께 20㎞ 행군이 끝났다. 훈련병들이 ‘청년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멋진 전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교관·조교들은 행군 종료 직후 열린 ‘육군전사 인증식’에서 훈련병들 목에 인식표를 걸어줬다. 교관·조교의 “고생했어” 한 마디에 훈련병들은 피로를 잊었다. 인식표를 목에 건 훈련병들이 자신을 격려하는 박수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단은 훈련병 중 30·40㎞ 장거리 행군에 나설 희망자를 받기 시작했다. 건강·체력 수준을 충족한 훈련병들이 곧바로 장거리 행군에 나섰다.

사단은 장거리 행군 완주 시 최대 2일의 포상 휴가를 부여해 참가 의욕을 높이고 있지만, 훈련병들에게는 휴가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였다. 유제성 훈련병의 “사격 등은 동기들보다 잘한 게 없었지만 심폐지구력 하나는 자신 있다. 그래서 도전하기로 했고 한계를 느껴보고 싶었다”는 말이 이들의 의지를 보여줬다.

새벽 3시30분, 훈련병들은 30㎞ 행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사단 군악대가 행군을 마친 훈련병들을 맞았다. 양우석 훈련병은 “정신력으로 버텨보려 장거리 행군을 했고, 목표를 이뤄 정말 기쁘다”며 “사단 기동대대 배치가 확정됐는데, 군 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양 훈련병 말대로 이들이 행군을 하며 얻은 자신감과 성취감은 남은 군 생활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동력이 될 것으로 보였다.


20㎏ 군장을 메고 행군에 동참한 본지 최한영 기자.
20㎏ 군장을 메고 행군에 동참한 본지 최한영 기자.

 

30㎞ 장거리 행군에 나선 양우석(왼쪽)·유제성 훈련병.
30㎞ 장거리 행군에 나선 양우석(왼쪽)·유제성 훈련병.



“기초가 확립된 최정예 신병 육성 목표” 

기자가 이날 동행한 행군은 사단 신병교육대대가 6주간 시행하는 교육의 하나다. 사단은 훈련병들의 성취감·인내심 향상을 위해 지난 11월부터 희망자를 대상으로 30·40㎞ 장거리 행군을 실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사단의 성과 있는 훈련을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훈련병들이 사격술 원리를 이해하고 친밀도를 높일 수 있도록 2~5주 차에 개인화기 교육 일정을 균일하게 편성했다. 정신전력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워크북 활용 참여형 교육, 병 복무단계별 인성 함양 교육과 신념화 발표, 지휘관 특강 등을 편성한 점도 눈에 띈다. 체력 단련 시에는 개인 체력 수준과 건강 상태를 고려한 측정을 함으로써 환자 발생 가능성을 낮췄다.

사단은 올해 성과를 분석해 내년에도 훈련병들이 배치 부대에서 높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병 육성에 매진한다는 방침이다.

진성호(중령) 신병교육대대장은 “전투원으로서 기초가 확립된 최정예 신병 육성을 목표로 대대원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우리 대대가 배출한 신병들이 각급 제대 전투력 창출의 원천임을 명심하며 사명감을 갖고 임무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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