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상처와 트라우마 그걸 파내다

입력 2024. 03. 05   16:16
업데이트 2024. 03. 0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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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오컬트 포장지로 꽁꽁 싸맨 ‘파묘’의 진짜 알맹이

의외성이 만들어 낸 전개 
흐릿한 기억 여전한 아픔
깊은 곳서 끄집어낸 속내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영화 ‘파묘’는 음험하다. 음산하고 험악한 것도 맞지만 그보다는 무덤을 파낸다는 ‘파묘(破墓)’라는 소재와 잇따른 기묘한 사건들을 전면 배치함으로써 오컬트 냄새를 잔뜩 흩뿌려 놓고 정작 깊숙한 곳에 중요한 알맹이를 꽁꽁 감춰 둔 속내 탓이다.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은 해당 지점에 도달해 비로소 그것을 확인했을 때 일말의 배신감 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다지 억울하진 않다. 예측을 벗어난 의외성이 만들어 낸 전개와 새로 마주한 이야기가 충분히 흥미롭고, 자칫 흐릿해지던 우리의 공통된 기억을 끄집어내 자극해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국뽕’ 정도로 폄훼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적 완성도와 촘촘하게 얽힌 배우들의 열연이 이러한 우려를 걷어 내고 덜어 내는 역할을 한다.

‘파묘’는 거액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미스터리 영화다. 땅을 찾는 풍수사 김상덕(최민식), 원혼을 달래는 무당 이화림(김고은), 예를 갖추는 장의사 고영근(유해진), 경문을 외는 법사 윤봉길(이도현)이 6개의 파트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 간다. 앞서 영화 ‘대무가’나 드라마 ‘미남당’처럼 무속인이 주인공으로 나선 작품도 있지만, 코믹이나 수사 장르에 유니크한 소재로 무속신앙을 버무린 형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파묘’처럼 무속인 존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경우는 흔치 않다. 장재현 감독의 전작인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에서도 무당이 등장하지만 의도한 기능적 역할만 수행할 뿐 제대로 활약하진 못했다. 그래서 무당 이화림이 보여 주는 파격적인 대살굿 장면은 관객을 숨죽이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모두의 감탄을 이끌어 냈다. 

파트 1~3인 전반부가 오컬트에 충실하다면 파트 4~6은 의도적으로 숨겨 뒀던 장르와 본격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러니 장르가 곧 스포일러다. 이는 ‘첩장(疊葬)’의 존재가 작품에 드러나면서부터다. 한 공간에 관을 중첩해 쌓은 첩장의 형태는 마치 전반부에 노출된 오컬트가 후반부에 등장하는 시대극과 크리처 장르를 교묘하게 감춘 것과 맞닿는다. 이는 장 감독이 구축한 오컬트 세계관의 진화이고 확장이다.

영리했다. 현재의 이야기, 그것도 숨죽인 채 오컬트 장르를 집중해 보고 있는 도중에 일제강점기 당시의 민족적 비극과 치욕의 역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올 줄이야. 예측하지 못한 습격은 보다 위력적인 법이다. 묫바람(묫자리를 잘못 써서 후손들에게 불운이 닥치는 일)에서 시작된 파묘, 파묘로 깨어난 ‘겁나 험한 것’에 감춰진 가족의 비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진 또 다른 무언가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점차 옅어지던 오랜 트라우마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는 묘한 울림이 존재한다. 뿌리를 숨긴 친일파 후손은 부정하게 축적한 부로 몇 대에 걸쳐 막강한 권력을 세습하고 여전히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억압과 핍박은 물론 민족의 정기마저 모조리 끊어 버리려던 악랄한 만행에 위험을 무릅쓰려는 끈끈한 연대, 그리고 이를 주저하게 만드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회의적이고 방관자적 태도. 일본 식민시대의 잔재는 여전히 현재를 부유하고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너머 어딘가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그날의 깊은 상처와 아픔이 상존한다. 

숨겨진 의도가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면, 곳곳의 상징이 연결돼 이윽고 빛을 발한다. 극 중 4명의 주인공 김상덕·이화림·고영근·윤봉길, 화림의 동료 무당 오광심·박자혜가 모두 실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고스란히 차용한 사실, 운구차 번호와 김상덕의 차 번호가 각각 1945, 0815로 대한민국 광복절을 연상시키고 김상덕이 묫자리에 던진 100원짜리 동전의 이순신 장군 모습이 일순 도드라진 것 등이 모두 다 그렇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 역할을 소화했던 배우 최민식이 맡은 김상덕의 활약도 왠지 의도하고 연결한 것처럼 묘한 기시감을 생성한다.

일련의 기이한 사건의 범인(?)이 애먼 반달곰으로 보도되고, 여론이 쏠리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의도적으로 가려지고 지워진 진실, 혹은 힘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 기록들과 역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누군가의 희생. 보이지 않는 실체적 진실과 직면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하고 이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되뇌며 흩어지는 마음을 힘줘 묶고 다잡는다.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상처와 트라우마가 많다. 그걸 ‘파묘’하고 싶었다”는 장 감독의 말이 뇌리에 박힌다.

※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느려도 밀도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느려도 밀도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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