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2차 대전 종전 이후 벌어진 전투
5일 만에 함락시키고 쿠릴열도도 장악
미국과 충돌 우려 홋카이도 점령은 포기
中·北 공산화 지원…냉전시대 신호탄
러시아, 미국 중심 질서 거부 대외정책
새 냉전 움직임…자주국방 중요성 커져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러자 태평양 전선을 관망했던 스탈린은 서둘러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석 달 전 유럽 전선에서 승리한 후 스탈린은 내심 일본이 더 버텨주기를 원했다.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사이 스탈린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더 많은 이득을 챙기고자 했다. 1944년 바르샤바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진격을 멈추고 독일군의 바르샤바 진압을 방관했던 것처럼 적끼리 싸우게 만들면서 이득을 취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란 스탈린은 다급히 참전을 결정했다. 소련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신들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는 것이었다. 미국 역시 스탈린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핵폭탄 개발계획)’를 성공하자마자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지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8월 11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입하자 일본은 당황했다. 그때까지도 일본 수뇌부는 소련이 중재에 나설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만주를 방어하던 일본 관동군은 허망하게 무너졌고, 8월 15일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만주를 통과한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했다. 소련의 개입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독자적인 승리는 빛이 바랬으며 한반도 분단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총성은 8월 15일에 멈추지 않았다. 종전일로부터 나흘이 지난 8월 19일, 사할린에 상륙한 소련군은 일본군 88사단을 공격했다. 사할린 전투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 벌어진 기이한 전투였다. 고립된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일본군은 소련군 지휘부에 거듭 종전한 사실을 알리며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사할린 남부 항구 마오카를 점령한 소련군은 오토마리(러시아명 코르사코프) 항구로 진격했다. 오토마리를 빼앗기면 본토로 돌아갈 퇴로가 끊기므로 일본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항구를 포위한 소련 군함들이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하면서 소련 해군 육전대가 지상에서 공격했다. 위기에 몰린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투와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25일에 오토마리는 함락되었고 수천 명의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포로가 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시베리아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몇 년 후에 풀려났다. 억류 기간에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첨예한 냉전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항의할 수 없었다.
소련은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섬들을 장악했다. 소련은 여세를 몰아 일본 북부 홋카이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국과의 정면충돌 위험을 고려하여 진격을 멈췄다. 1945년 9월에야 뒤늦게 일본 본토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소련의 사할린과 쿠릴열도 점령을 견제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전쟁으로 지친 미국과 소련은 새로운 전쟁을 꺼렸다.
사할린은 소련에게 단순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라 역사적인 ‘원한의 장소’였다. 1875년 러시아와 일본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의 사할린 지배에 합의했다. 그러나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 남사할린 지역을 차지했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러시아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냈던 일본은 사할린이라는 상징적 전리품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큰 이득을 보았다. 미국은 일본에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필리핀을 차지했다. 게다가 러시아령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하여 알래스카의 안전을 도모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대한제국을 전리품으로 취급했다. 미국은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었다. 러·일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일본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러·일 전쟁 패배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실업자가 폭증했고 차르의 위신은 바닥에 떨어졌다. 결국 제정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너졌다.
스탈린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겪은 수모를 잊지 않았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참전한 소련이 아시아에서 떳떳하게 지분을 요구하려면 최소한의 희생이 필요했다.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이 쉽게 항복하자 스탈린은 사할린을 선택했다. 사할린 전투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스탈린은 크게 만족했다. 소련은 독·소 전쟁보다 훨씬 적은 희생으로 영토를 수복하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를 궁지에 몰았던 미국에 강력한 경고를 보낼 수 있었다. 사할린 전투는 영토 문제이기 전에 역사적 원한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일본계 미국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는 자신의 저서 『종전의 설계자들』(메디치미디어, 2019)에서 사할린 전투는 미·소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다고 지적한다. 사할린 전투의 여파는 우리의 운명과도 무관하지 않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 미국의 충실한 우방이 되었고, 냉전으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러·일 전쟁과 두 차례 세계대전의 상처를 기억하는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가로 만들고 중국과 몽골, 한반도 북부의 공산화를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동족 간에 끔찍한 전쟁을 겪어야 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도 완충지대를 만들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거부하는 러시아의 무리한 대외정책이 낳은 결과다.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하게 얽힌다. 일본과 러시아는 여전히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두고 대립하고, 러시아는 중국과 연합하여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때 한국인들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자주국방과 슬기로운 외교가 동시에 요구되는 시점이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남북 관계를 관리하면서 기후변화, 팬데믹과 같은 재난도 대비해야 한다. 이제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새 지도자가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길 희망한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