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서 대한민국 궁중문화축전의 일환으로 전통예술 명인들의 공연이 열렸다. 채상소고춤(상모를 돌리며 소고를 연주하는 춤)의 명인 김운태 선생이 피날레를 장식하게 됐다.
코로나19로 공연들이 멈춘 지 수개월 만이었다. 덕수궁 함녕전 앞 간이무대 위에서 한발 한발을 깊고 소중하게 디디며 춤을 추는 명인의 모습이 한 폭의 수묵채색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코로나19 관련 안전지침 준수 등이 까다롭게 적용됐고, 초미세먼지가 심각 상황으로 치솟았지만 함께 흥을 내고, 장단을 맞춰준 관객이 참 고마웠다.
그런데 무대 위를 누비는 명인들의 춤을 무대 뒤에서만 바라보는 젊은 후배 예술인들을 보니 마음 한편이 짠해져 온다. 이들은 이 무대에 얼마나 오르고 싶을까? 자신이 가진 기량과 흥을 얼마나 쏟아내고 싶을까?
하지만 원한다고 모두 다 무대 위에 오를 수는 없다. 이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여정을 힘찬 걸음으로 걸어간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밀려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여정이 항상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밀려나느냐’로만 평가를 받는 것이 안타깝지만 세상의 평가는 언제나 그 기준이다.
“저는 속도가 아주 느려요. 무언가를 익히는 것도 느리고 순발력도 뛰어나지 않아서 배운 것을 응용하는 데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농악 연희단에서 상쇠(농악패의 꽹과리 제1주자로 농악대를 총지휘하는 리더)를 맡고 있는 친구가 명인의 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한다. 춤이나 악기가 아닌 소리를 전공했기에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적잖이 부담을 느껴왔던 친구다.
“하지만 저는 흔들리지 않고 한 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은 잘할 수 있어요. 느리지만 끈기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그것 역시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저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이 친구의 담담한 고백이 가슴에 남는다. 이 기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공적인 인생 여정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각해 봤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여정, 성취, 평가는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기준으로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바꾸어 볼 수 있다. 우리 인생 여정의 평가를 속도와 방향보다는 그 두께와 질량으로 정의 내려 보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것만을 인생의 여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디더라도, 때로는 제자리걸음을 하더라도 깊게, 무게감 있게, 튼실하게,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것도 인생 여정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속도와 방향과 성취보다는 그 자리에서 두껍게 질량을 높이는 것 역시 인생 여정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농악패의 상쇠와 부쇠(농악패의 리더인 상쇠 다음의 두 번째 꽹과리 주자로 대부분 연주 기술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 그 자리를 맡는다)는 타고납니다. 대부분 부쇠는 상쇠보다 꽹과리 연주도 잘하고 기량도 뛰어나요. 하지만 부쇠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상쇠가 될 수 없어요. 상쇠는 연주를 잘하는 역할이 아니라 전체가 잘 어우러지도록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뿌리를 내려주는 역할이거든요. 기량이 뛰어난 사람은 자기 기량을 드러내고 싶어 하죠. 하지만 리더가 자기 기량에만 집중하면 농악패의 연희는 무너지고 맙니다.”
50년 동안 농악패에서 활동한 김운태 명인이 숨을 고르며 한마디를 던진다. 우리 인생의 기준에 대해 또 한 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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