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과 엔리케 그라나도스
마른전투 이후 정체된 전황 속 해상으로 눈돌린 독일
비밀리 지속된 잠수함 작전 여객선 침몰시키며 역풍…
‘고예스카스’ 뉴욕 공연 뒤 귀국길 그라나도스도 희생돼
美, 자국민 사망·멕시코와 이간질 알게 돼 참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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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는 독일 북동부와 오스트리아 영토를 공격했지만 8월 말 탄넨베르크(지금의 폴란드 그룬발트 지역)에서 독일군에 크게 패하며 주도권을 잃었다. 결국 독일군이 전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수세로 전환해야 했다. 러시아 내부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을 둔 반정부 시위가 격화돼 전쟁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특히 1917년 혁명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배를 선언하고 이탈했다.
열강들이 전투에 돌입하자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정부군과 반군 간 전투가 시작됐다. 영국과 동맹을 맺었던 일본은 독일이 식민지로 운영하던 중국 칭다오를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처음 3국 동맹에 속했지만 1915년 3국 협상국에 가입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알프스 일원에서 밀고 당기는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 북부 마른전투 이후 정체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지역으로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참호전의 서막 이프르전투
벨기에 서부 이프르 지역에서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총 5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1차 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기동전에서 참호전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1914년 9월 마른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저지된 뒤 영국·프랑스와 독일은 북쪽 해안으로 이동하며 상대의 측면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특히 벨기에 해안 지역을 먼저 차지하고 돌파를 통해 기동전을 마무리함으로써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벨기에군 포함)과 독일군은 1914년 10월 1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포병 화력을 앞세워 돌파를 시도했지만 연합군은 참호를 파고 끈질기게 방어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연합군 역시 독일군을 몰아내지 못했다. 양쪽은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참호를 파놓고 대치하는 전략적 교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모두 20만 명 이상의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숙련된 영국 초기 원정군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프르전투는 기동에 의한 전투가 끝나고, 지루하고 참혹한 참호전과 소모전이 서부전선에 정착되는 시발점이 됐다.
1915년 2차 이프르전투에선 독일군이 최초로 대규모 염소가스를 살포하면서 화학전이 본격화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프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합군이 쥐고 있던 핵심 돌출부로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
참혹했던 솜전투
베르뒹전투가 벌어지던 시기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솜(Somme)강 유역에서는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솜전투가 있었다. 연합군은 베르뒹에 집중된 독일군 압박을 분산시키고,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며 독일군 전력을 소모시킬 필요가 있었다. 대규모 포격과 함께 폭우와 진흙 속에서 영국군이 공격을 개시했으나 독일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군의 피해가 심각했다. 9월에는 영국군이 최초로 전차(Mark-I)까지 투입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참호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양쪽은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11월 전투를 끝내야 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그러던 중 독일이 눈을 돌린 곳은 해상이었다. 독일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병력과 전쟁물자가 계속 유입되는 한 전쟁이 오래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강한 해군력을 갖춘 영국 해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있어 독일로서도 군수물자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라 이를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투입된 것이 바로 ‘U보트(Unter Sea Boat)’라는 독일 잠수함이었다. 독일은 1915년 2월부터 U보트를 영국·프랑스 해협에 집중 배치해 연합국과 중립국 선박에 경고 없이 마구 공격을 가했다.
독일의 잠수함전 능력은 월등했다.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잠수함을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전쟁 초기에는 20~40여 척을 운용했고, 크기는 200톤에서 700톤 정도였다. 1915년에는 약 120척, 전쟁 말에는 300척 이상이 생산됐다. 그러던 중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이 아일랜드 해안에서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2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128명의 미국 시민도 있었다. 그동안 참전하지 않고 있던 미국에서 반(反)독일 여론이 들끓자 독일이 급히 사과하며 잠수함 작전 중단을 선언해 일단 정리가 되는 듯했다.
‘치머만 전보 사건’과 미국의 참전
미국은 전쟁 초 중립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참전은 신중히 검토할 문제였다. 게다가 독일이 더는 잠수함 작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검토 자체를 보류했다. 하지만 독일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917년 2월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다. 게다가 미국이 참전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치머만 전보 사건’이다.
독일은 멕시코와 미국을 대립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에게 비밀 전문을 보냈는데, 이게 감청됐다. 당시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이 보낸 전문을 보면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이후 미국이 중립으로 남기를 원하지만 만약 미국이 연합군에 참여한다면 멕시코합중국과 독일 제국이 동맹을 맺어 멕시코가 미국에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영국은 이를 감청해 미국에 전달했다. 이로 인해 미국도 마침내 1917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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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침몰당한 엔리케 그라나도스
중단하겠다던 독일의 잠수함 작전은 비밀리에 지속됐는데 1916년 3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스페인의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와 그의 가족이 타고 있던 배를 독일 잠수함이 공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그라나도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스페인 근대 음악과 민족주의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스페인 민속 음악의 색채와 리듬을 잘 융합했으며, ‘스페인 무곡집’ ‘시적 왈츠’ 등으로 잘 알려졌다. 당시 그가 뉴욕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한 오페라는 ‘고예스카스(Goyescas)’였다.
이 오페라는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그라나도스는 1911년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작곡했는데, 이 곡이 큰 호평을 받자 이를 바탕으로 1막 3장의 오페라로 재구성한 것이다. 고귀한 여인 로사리오를 사랑하는 근위대장 페르난도가 투우사 파키로와 그의 연인 페파의 등장에 질투심을 느낀다. 결국 페르난도와 파키로는 결투를 치르고 페르난도가 패해 로사리오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1장과 2장 사이에 연주되는 간주곡, 인터메조를 들으며 전쟁으로 희생된 그라나도스의 짧고, 안타까웠던 삶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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