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바람길 따라 실향민과 함께 스며든 ‘무태어’

입력 2026. 03. 12   15:55
업데이트 2026. 03. 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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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 곳 >> 미시령 넘어 용대리 ‘명태 로드’ 

함경도 일대서 잡히기 시작한 생선
1·4후퇴 때 건조법 아는 실향민들 월남
고성·인제 잇는 산길 따라 명태 운반
북풍·눈보라 뚫고 북어·동태 생산
사철음식으로 인기 연 40만 톤 소비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 ‘명태’, 양명문(1913~1985)

명태는 북녘 사람들과 궤를 같이해 왔다. 이 생선이 우리 바다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6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무태어(無泰魚)’로 수록했다. 처음 잡혔을 때 함경도 도백이 명천(明川) 어부 태(太)씨가 잡은 데서 명태(明太)로 지었다(『임하필기』)는 설이 전하지만, 명나라 태조를 의식해 계속 무태어라 부르다가 명이 멸망하고 난 후인 1652년 ‘명태어(明太魚)’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승정원일기』, 효종 3년). 찬 바다 어종인 명태가 그즈음 러시아 베링해에서 명천까지 내려왔다는 얘기인 것으로 구보는 이해한다.

새 생선은 대량으로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되면서 ‘북어(北魚)’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재물보』). 이후 차츰 말린 명태를 북어로 부르게 됐다(『난호어묵지』). 보관을 위해 생물보다 말린 생선을 선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1800년 이규경이 펴낸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명태를 ‘가장 많이 잡히는 어종’으로 서술했다. 1917년 기록에도 명태는 전체의 28.8%로 어획량 1위를 차지했다(『한국명태어업사』). 1871년 『임하필기』는 “300년 뒤에는 이 고기가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라는 민정중의 언급을 소개했는데 그의 예언보다 이르게 우리 바다에서는 명태가 사라졌다.

북태평양 어장 개척 덕에 1987년 어획량 20만 톤을 기록한 뒤 급감했다. 1982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경제수역을 설정해 조업을 규제한 데 따른 것이었다. 수온도 50년 동안 2도가량 올라 명태가 북상해버려 2008년 이후 우리 바다에서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게 됐다. 지금은 전량을 러시아·미국·노르웨이·일본 등에서 수입한다.

그럼에도 명태 소비량은 연간 40만 톤에 이른다. 탕과 구이, 조림 외에 식해나 젓갈을 만들어 사철 즐겨 먹는다. 간과 알, 껍질, 아가미까지 모두 식재료로 삼는다. 명칭도 잡히는 시기와 장소, 건조 상태에 따라 생태·황태·동태·북어·코다리·노가리·먹태·춘태·원양태 등 다양하다. 3개월 말리는 황태의 육질이 가장 부드럽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만큼 우리 식생활과 밀접하다는 방증이다.

명태의 ‘국민생선’ 유지 배경에는 함경도 실향민이 있다.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해 강원 간성(고성·속초 일대) 바닷가에 정착한 이들은 고향에서 하던 대로 명태를 잡아 말려 생계를 이었다. 황태 생산은 함경도만의 건조법을 따른다.

실향민들은 전통방식으로 황태를 만들 덕장을 찾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를 발견했다. 설악산 넘어 서쪽 내륙이었다. 화전민들이 불을 놓아 밭을 일궈 감자·조·옥수수 농사를 짓던 오지였다. 영하 10도 이하, 적절한 습도, 건조한 바람이 균일한 분지가 필요했는데 미시령과 향로봉 사이의 골짜기 바람길이어서 북풍과 눈보라가 함경도 못지않았다.

동서를 잇는 차도가 없던 때여서 명태 운반에 고충이 따랐다. 구보는 1980년대 용대리 원로들로부터 “처음에는 고성서 산을 넘어 지게로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 산길이 강원 고성과 인제를 최단으로 잇는 새이령 길이었음을 알게 됐다. 진부령과 미시령 두 준령 사이에 난 길이라 해서 ‘샛령’이라 부르다가 새이령이 됐다. 한자로는 간령(間嶺)으로 쓴다. 역시 샛고개라는 뜻이다(『한국지명유래집』). 도보로 4시간 남짓 걸리는 이 11㎞ 길이의 산길은 오랫동안 간성의 해산물과 인제의 곡물이 유통되던 통로였다.

조선시대에는 ‘미시파령(彌矢坡嶺)’이라고 불렀다. 길이 험해 사용과 폐쇄를 거듭하다 성종 때부터 다시 사용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보부상이나 지게꾼, 말 등만 통행이 가능했다. 1960년대까지도 이용됐으나 미시령을 넘는 속초~용대리 30㎞ 구간에 도로와 터널이 잇달아 생겨 운행 시간이 단축되면서 새이령길은 존재감을 상실했다. 지금은 고성 쪽 입구인 도원리 주민들이 인제를 오갈 때 간혹 이용하고 심마니들과 계곡에서 야영하려는 백패커들이 찾는 정도다. 구보는 2018년 처음 이 길을 걷다가 여러 흔적과 마주쳤다. 보부상, 거간꾼들이 모여 어물과 곡류, 소금 등을 거래하던 ‘마장(馬場)터’가 무성한 억새에 덮여 있었고, 정상부인 간령에는 무사안녕을 빌던 서낭당과 돌무덤이 남아 있었다.

초기 용대리 덕장 풍경은 초라했다. 나무 덕(건조대) 몇 줄에 지게로 날라 온 명태 수천 마리 정도 거는 게 고작이었다. 실향민이 몇 명 머물며 작업을 했다. 용대리 모습은 도로 개설과 함께 바뀌기 시작했다. 육군3군단이 8개월 걸려 1959년 11월 28일 미시령 도로를 개통(『대한뉘우스』)하면서였다. 폭 3~4m의 비포장에 ‘S자’ 코스가 많아 지프차와 군용트럭이 겨우 넘을 정도여서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됐지만, 이 도로 덕에 1960년대 용대리 덕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말릴 명태 양이 많아지면서 차츰 용대리 주민들이 맡게 돼 화전민의 삶이 큰 변화를 맞았다(『인제군 향토지』). 손을 놓고 지내던 겨울철 농한기에 더욱 바빠지게 됐다. 폭설과 삭풍에 노출시켜 명태를 얼리고 녹이기를 되풀이하는 덕장 작업은 화전 농사보다 힘들었을 터였다. 농한기 수입 덕에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1970~1980년대 미시령 도로 일부 구간이 포장됐고, 1989년에는 왕복 2차선으로 민간에 개방된 덕에 용대리 덕장은 산업화 규모로 커졌다. 7만 평 부지 44개 덕장에서는 12월에서 4월까지 1000개 안팎의 덕에 400만 마리가 걸린다. 70~80%의 황태가 이곳에서 생산된다(용대리황태조합). 이로써 유서 깊던 새이령 길은 ‘명태 로드’ 지위를 미시령 도로에 넘기고 운송로의 족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코를 꿰고, 널고, 뒤집고,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등 황태를 상에 올리는 과정은 많다. 그런 황태를 돼지고기나 두부, 묵은지와 함께 육수에 끓여 내면 음식은 마침내 예술이 된다.

3월 초 용대리는 50㎝의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덕장에 걸린 황태들이 눈이불을 덮은 채 숙성에 들어갔다. 구보는 백색 일색의 설경 앞에서 엄숙함을 느낀다. 자연 속에서 소리 없이 탈태하는 존재의 지극한 모습 때문이었다. 아울러 북쪽 먼바다에서부터 간성에 닿아 새이령을 넘어 용대리까지 이어졌던 옛 ‘북어(北魚)’의 궤적을 떠올리며 장엄함을 넘어 성스러움을 느낀다.

 

새이령 산길.
새이령 산길.

 

강원 인제군 용대리의 황태 덕장.
강원 인제군 용대리의 황태 덕장.

 

새이령 마장터.
새이령 마장터.

 

간령에 남아 있는 서낭당.
간령에 남아 있는 서낭당.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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