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봄볕 한 줌…별빛 한 톨… 어린 왕의 꿈속을 거닐다

입력 2026. 03. 12   15:54
업데이트 2026. 03. 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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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는 대로, 닿는 대로 
예술과 자연, 역사 그리고 별빛…강원도 영월

영화 ‘왕사남’ 흔적 외에도 볼거리 천국
탄광마을 체험·거대한 설치미술 공간…
임진왜란 ‘고씨 일가’ 숨은 석회동굴도
산골짜기 와인 한 잔, 낮의 피로 녹이고
쏟아지는 별 구경까지…하루론 모자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강원 영월군이 뜨겁게 주목받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개봉 직후부터 입소문을 타며 영월행 여행 수요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덕분에 영월 곳곳에는 영화 속 정취를 직접 눈에 담으려는 여행자들로 활기가 넘친다. 그런데 청령포에서 발길을 돌리기에는 영월이 너무 아깝다. 동강과 백두대간이 한데 얽히며 빚어낸 절경부터 재생자원으로 탄생한 설치미술관, 공공 천문대 중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별 관측소, 4억 년이 넘는 세월이 조각해 낸 석회동굴까지. 영월은 청령포 하나로 다 설명되지 않는 고장이다. 영화가 알려 주지 않은 영월의 또 다른 비경을 만날 시간이다.

장릉 주변을 걷는 방문객들.
장릉 주변을 걷는 방문객들.


장릉-영화가 더 빛나게 한 비운의 왕릉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영월을 찾은 이라면 장릉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조선 6대 국왕 단종의 능인 이곳은 청령포와 함께 영화의 정서적 배경을 이루는 공간이다. 즉위한 지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영월 호장 엄흥도가 버려진 유해를 몰래 수습해 장례를 치렀고, 이후 중종이 묘를 찾아 정비했다. 1698년 숙종에 이르러서야 왕릉으로 승격된, 그 어느 능보다 각별한 사연을 지닌 공간이다.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는 소박하지만 봉분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책로처럼 조성돼 있다.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펼쳐진다. 입구의 단종역사관에서 그의 짧고도 안타까운 삶을 먼저 살펴보고 능역을 거닐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봄볕 하나하나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단종의 애달픈 사연이 깃든 숲을 빠져나오면 이제 영월의 굽이치는 대자연이 여행자를 위로할 차례다. 발길을 동강으로 돌려 보자.


평창강이 만들어 낸 ‘한반도 지형’을 따라 뗏목이 지나가고 있다. 필자 제공
평창강이 만들어 낸 ‘한반도 지형’을 따라 뗏목이 지나가고 있다. 필자 제공


한반도뗏목마을-뗏목 위에서 동강 한 바퀴

태기산에서 발원해 굽이쳐 흐르는 평창강(서강)은 선암마을을 지나며 거대한 한반도 지형을 조각해 냈다. 전국 곳곳에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있다지만 이만큼 흡사한 모습은 찾기 어렵다. 전망대 입구 주차장에서 오솔길을 따라 15분 남짓 오르면 동쪽으로 백두대간을 연상케 하는 언덕이 솟아 있고, 왼편으론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울릉도와 독도 위치에는 나무 군락이 형성돼 완벽한 한반도의 자태를 뽐낸다.

한반도 지형을 더 가까이서 만나고 싶다면 한반도뗏목마을로 발길을 옮겨 보자.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전통뗏목은 스무 명 이상이 오를 수 있는 규모다. 신발을 벗고 강물에 발을 담근 채 서강의 물줄기를 즐기는 동안 해설사가 들려주는 마을의 역사와 서강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선착장 한편의 간이매점에서 감자전과 막국수 같은 강원도 향토음식을 맛보며 쉬어 가는 것도 좋다.


젊은달와이파크에 설치된 대형 파빌리온. 필자 제공
젊은달와이파크에 설치된 대형 파빌리온. 필자 제공


젊은달와이파크-자연 속 설치미술 놀이터

붉은 철제 파이프로 만든 대형 파빌리온, 폐목재를 층층이 쌓아 올린 조형물. 젊은달와이파크는 영월의 청정 자연과 기발한 설치미술이 묘하게 어우러진 예술공간이다. 한때 술샘박물관이었던 건물을 공간디자이너 최옥영이 재창조한 이곳은 영월의 새로운 인증샷 성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전시된 작품 대다수가 철거 자재나 폐목재 같은 재활용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버려진 것들이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이 자연 속에 놓이는 순간 전혀 다른 생명을 얻는다. 단순한 인증샷 성지로만 보기에는 아깝다. 작품 하나하나의 제작 의도를 천천히 곱씹다 보면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이라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영월관광센터 전경. 필자 제공
영월관광센터 전경. 필자 제공


영월관광센터-관광안내소? 미술관!

이름만 관광안내센터일 뿐 실상은 미디어아트 미술관에 가깝다. 폐광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세운 이곳에서는 한국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를 경험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전통민화가 살아 움직이는 대형 미디어아트 쇼가 단연 인기다. 달나라에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옛 설화 속 장면들이 화려한 영상으로 펼쳐지며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미디어아트에서 만났던 오브제를 2·3전시관에서 실제 작품으로 다시 마주할 수 있으니 함께 둘러보자. 카페와 로컬푸드 직매장까지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강원특별자치도 탄광문화촌에 재현된 광부 마을의 모습. 필자 제공
강원특별자치도 탄광문화촌에 재현된 광부 마을의 모습. 필자 제공


강원특별자치도 탄광문화촌-산업의 역사

영월은 한때 삼척, 태백과 함께 광업으로 번성했던 고장이다. 북면 마차리 일대의 거대한 탄광촌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을 간직한 강원특별자치도 탄광문화촌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1970~1980년대 광부 마을을 재현한 생활관을 거닐며 당시 광부 가족들의 일상을 살펴보고 실제 갱도를 방불케 하는 전시관에서 탄광작업 현장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석탄을 나르던 트롤리와 광부들의 작업복, 생활용품까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살아 있는 산업 역사를 선사한다.


고씨굴 내부 모습. 필자 제공
고씨굴 내부 모습. 필자 제공


고씨굴-4억 년의 침묵이 깃든 석회동굴

임진왜란 때 고씨 일가가 몸을 숨겼다고 고씨굴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 동굴의 진짜 역사는 훨씬 더 아득한 곳에서 시작된다. 고생대(약 4억~5억 년 전)에 형성된 석회암 지층을 물이 수억 년에 걸쳐 녹이고 조각해 탄생한 비경이다. 일가족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있는가 하면 고개와 허리를 최대한 숙여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간도 많다. 아득한 세월이 빚어낸 종유석과 석순이 구석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면 판타지 영화 속 탐험가가 된 기분이 절로 든다.

고씨굴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인근 영월동굴생태관을 함께 둘러보자. 동굴의 생성 과정과 내부 생태계를 주제로 한 상설전시가 마련돼 있다.

 

예밀와인마을에서 맛볼 수 있는 와인들. 필자 제공
예밀와인마을에서 맛볼 수 있는 와인들. 필자 제공


예밀와인마을-와인 향에 취하는 산골짜기

영월군 김삿갓면 깊숙한 골짜기, 일교차가 크고 석회질 토양이 펼쳐진 이 땅에서 해마다 당도 높은 포도가 영근다. 예밀촌마을의 포도다. 흔히 포도는 ‘괴롭혀야’ 맛과 향이 더욱 좋아진다고 하는데, 망경대산 일대의 척박한 지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 포도로 레드 드라이, 레드 스위트, 로제, 화이트, 국산 머루를 블렌딩한 프리미엄 드라이까지 5종의 와인을 직접 빚어낸다.

예밀와인힐링센터에서는 5종의 와인을 모두 시음하고 구매할 수 있다. 이곳의 와인 족욕 체험도 꼭 경험해 보길 권한다. 따뜻한 물에 진한 레드와인을 첨가해 은은한 향을 더한 족탕에 발을 담그고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 여행 중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몇 년 전 이 마을을 지나는 도보여행길인 ‘운탄고도’ 2코스가 조성되면서 걷기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꼭 들르는 쉼터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별마로천문대 야경. 필자 제공
별마로천문대 야경. 필자 제공


별마로천문대-밤하늘 쏟아지는 봉래산 정상

영월시내에서 차로 20분 남짓, 해발 800m 봉래산 정상에 자리한 별마로천문대는 공공 천문대 중 가장 성능 좋은 망원경을 갖춘 시설이다. 지름 80㎝ 주 망원경으로 맑은 날이면 별과 행성을 또렷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영월군의 연평균 별 관측 가능일이 160~190일에 달하는 만큼 날씨만 맞는다면 압도적인 밤하늘이 기다린다.

돔 형태의 천체투영실에서 계절마다 달라지는 가상의 밤하늘을 감상하고 날씨가 좋을 때면 실제 망원경으로 천체를 직접 관측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아도 내부 상설전시관과 전망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산 정상의 야간 한기가 예상보다 강하니 두꺼운 겉옷을 반드시 챙기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



영월 1박2일, 이렇게 즐기자

영화 한 편이 불러온 영월 열풍, 이참에 제대로 누려 보자. 영월은 면적이 넓어 동선을 잘못 짜면 이동에만 시간을 다 쓰게 된다. 서부(한반도 지형·젊은달와이파크)와 북부(탄광문화촌)를 거쳐 읍내(장릉·영월관광센터·별마로천문대)를 둘러보고, 동남부(고씨굴·예밀와인마을)로 빠지는 동선이 가장 효율적이다. 서울에서 영월까지는 승용차로 약 2시간3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약 3시간이 걸린다. 청령포에서 시작한 여행이 동강 위 뗏목에서, 별빛 가득한 봉래산 정상에서, 와인 향 가득한 산골 골짜기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영화가 알려 주지 않은 영월의 진짜 얼굴을 올봄 직접 확인해 보자.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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