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120년 전에 알렸다 120년 이어온 울림

입력 2025. 07. 08   16:49
업데이트 2025. 07. 0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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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전국 독립운동기념관 탐방 ⑤ 경기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푸른 눈의 英 종군기자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통해 지평에서 시작된
의병운동 정신 전 세계에 알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5년 을사늑약 침탈
1907년 고종 황제 폐위 일제 침략에
들불같이 일어난 의병 기념관 곳곳에 새겨져

“야간 습격에 대비해 초병을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초병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주민들 모두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돼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


1907년 11월 7일 영국 데일리메일 종군기자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가 지평의병장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이 내용은 매켄지가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저술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죽을지언정 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는 선조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독립운동에 앞서 일제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운동이 있었다. 의병운동의 효시는 바로 ‘을미의병’이다. 지평은 바로 이 을미의병이 시작된 곳이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은 이러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글=임채무/사진=조용학 기자

매켄지
매켄지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과 전차 전시물.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과 전차 전시물.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 한적한 시골 풍경 속에 서 있는 기념관은 고요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12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묵직한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노해 봉기한 ‘을미의병’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 이곳 지평이 어떻게 항일 의병 활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지를 소개한다. 지평에서 의병 활동이 시작된 배경에는 사상적·지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화서 이항로 선생이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 양평군 서종면 벽계구곡에 자리 잡자 그에게서 학문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가 가까워 남과 북의 선비들이 모이기 좋은 지리적 이점이 한몫했다. 이들은 이항로 선생으로부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배우게 된다. 위정척사는 조선 말기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직역하면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이 운동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 정신은 의병 봉기의 정신적 자양분이 됐고, 훗날 항일 무장투쟁으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형적 특성도 큰 역할을 했다. 양평 지역의 75%는 산지다. 높진 않지만 첩첩이 이어진 산세는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하고 변변한 무기도 없던 의병에게 최적의 활동 무대였다. 이에 따라 양평 용문산은 후기 의병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다.


양평을미의병묘역의 양평의병추모비.
양평을미의병묘역의 양평의병추모비.


국난 앞에 신분의 벽을 넘은 이들


기념관은 1895년 을미의병의 시작이 유생 이춘영과 포수 김백선의 만남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였지만 여전히 양반과 평민의 벽은 높았다. 그러나 국난 앞에서 이들은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김백선과 인연이 있는 지평 현감에게 무기 등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이춘영의 처가가 있는 원주 안창에서 군자금을 모아 첫 봉기를 감행했다. 이들의 기세는 상당했다. 원주와 제천 관아에 있던 일본군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을 정도로 매서웠다. 이들은 기세를 몰아 제천·영월·단양 등지에서 일본군을 연파했다.

승승장구하던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분 문제 때문에 발목을 잡혔다. 김백선은 일본군의 핵심 탄약고가 있던 가흥 점령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총대장 유인석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양반이었던 유인석은 평민 출신인 김백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지원 없이 전투에 나선 김백선의 부대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수많은 부하를 잃었다. 분노한 김백선은 유인석에게 항의했지만, ‘하극상’으로 몰렸다. 군법회의에 넘겨진 그는 “군법으로 죽이려거든 차라리 전장으로 보내 달라.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외쳤지만,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에 크게 패하면서 의병들은 힘을 잃었고, 전기 의병 활동은 막을 내렸다. 을미의병은 분명 한계를 지녔지만, 국모 시해라는 국가적 치욕에 맞서 양반과 평민이 함께 일어선 최초의 대규모 항일 의병이란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들의 저항은 이후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초가 됐다.

 

 

국방정신전력원 군인정신리더과정 교육생들.
국방정신전력원 군인정신리더과정 교육생들.


의병이 남긴 불씨가 독립운동의 횃불로

이른바 중기 의병운동으로 불리는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일어났다. 을미의병 때 활동했던 인물들과 최익현, 민종식 등 관리들이 주도했지만 큰 성과 없이 마무리됐다.

2년 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다시 한번 의병운동이 일어난다. 바로 후기 의병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정미의병’이다. 정미의병은 해산된 군인이 대거 합류하면서 이전 의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력과 전투력이 강화된 전면 항일전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로 진격,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다가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이유로 장례를 치르러 가면서 지휘체계가 무너졌고,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일제는 의병 근거지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한 ‘남한 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며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를 저질렀다. 의병의 총사령부 역할을 했던 용문사를 비롯해 상원사 등 양평의 수많은 사찰과 민가가 이때 불타 잿더미가 됐다. 이런 초토화 작전으로 대규모 부대 활동이 불가능해진 의병들은 소규모 유격대로 전환해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끈질긴 항전을 이어 갔다.

비록 국내에서의 대규모 항전은 위축됐지만, 의병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상한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활동 무대를 옮겨 항전을 지속했다. 이들은 1910년대 이후 독립군으로 계승 발전하며, 훗날 독립전쟁의 주역이 됐다. 결과적으로 정미의병의 피와 땀은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을 지연시키는 데 이바지한 것은 물론 국내외 항일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초석이 됐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전경.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전경.


푸른 눈의 이방인이 밝힌 이름 없는 이들의 기록 

그동안 지평 출신 의병들의 활약상은 대부분 ‘제천의병’의 기록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역사를 세상에 알린 이는 푸른 눈의 이방인, 매켄지였다. 기념관은 매켄지와 관련된 기록도 자세히 전시하고 있다. 그는 저서 『대한제국의 비극』에 이춘영, 김백선 등 지평 출신들이 의병의 선봉장이었음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 덕분에 지평 출신 의병은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매켄지는 1906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의병운동이 일어난 지역을 답사했다. 특히 1907년 11월 7~8일 삼산리전투가 벌어진 직후의 양평 지역을 방문해 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만난 의병에는 군인과 유생, 농민, 어린 소녀도 있었다. 그는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무심하지도 않다”고 기록한 뒤 “한국인은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육의사열전』 전시물.
『육의사열전』 전시물.


의병정신, 나라사랑정신으로 이어져 

취재하면서 단체관람을 온 군인들을 여러 팀 볼 수 있었다. 인근 부대에서 정신전력교육의 하나로 온 장병들도 있었고, 국방정신전력원(정전원) 군인정신리더과정 교육생들도 있었다. 특히 군인정신리더과정 교육생들은 각 군 주임원사들이어서 눈에 띄었다.

이들을 인솔한 노순용 정전원 교수는 “군인정신리더과정은 군인들에게 단단한 군인정신을 심어 주기 위해 개설한 프로그램”이라며 “2017년부터 군인정신리더과정에 입교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기념관 답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인정신리더과정은 군인정신 이해, 신념화, 행동화의 3단계로 이뤄진다. 이들은 마지막 3단계 현장교육의 하나로 기념관을 찾았다”며 “기념관이 2019년 리모델링하고 난 뒤 단순히 역사적 장소에서 항일운동의 상징인 을미의병의 의미와 6·25전쟁 당시 지평리전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해 군인정신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주임원사들은 지평리전투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의 발상지가 지평이라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모습이었다.

송용원 육군원사는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한 국민이 들불같이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선 건 나라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정신은 현재 나라를 지키는 우리 군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교육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면 병사들에게 의병과 6·25전쟁 당시 국군, 유엔군의 정신을 알려 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국방정신전력원 군인정신리더과정 교육생들.
국방정신전력원 군인정신리더과정 교육생들.


평화로운 오늘, 그 위에 선 희생의 기록 

기념관의 특징 중 하나는 6·25전쟁 때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 낸 지평리전투를 함께 조명한다는 점이다. 1951년 2월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평택-단양-삼척 선까지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지평리에서 극적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주축이 된 연합군은 이곳에서 중공군 5만 명과 3일간의 혈투 끝에 승리했다.

비록 모습은 달랐지만, 의병과 6·25전쟁 당시 국군이 보여 준 정신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국난 극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다.

박형규 육군원사는 “지평리라고 하면 단순히 지역 이름으로만 생각했는데, 의병 활동과 지평리전투에 관해 들으니 새로웠다”며 “이곳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지킨 국군과 유엔군이 자랑스럽고,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기념관은 지금까지 탐방했던 곳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념관 관계자는 휴관일을 제외하고 한 달 중 15일 정도 사람들이 찾는다고 했다. 실제 기자가 취재하는 동안도 군인을 포함해 민간인 단체관람까지 6개 팀이 기념관을 방문했다. 역사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젊은 군인부터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까지 여러 세대의 발길이 이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수호한 역사를 배우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기념관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튼튼한 다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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