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 7월의 6·25전쟁영웅

입력 2025. 06. 30   16:08
업데이트 2025. 06. 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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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 광복회 조직으로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이었던 대구 상덕태상회. 사진=국립중앙도서관
‘7월의 독립운동’ 광복회 조직으로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이었던 대구 상덕태상회. 사진=국립중앙도서관


7월의 독립운동…광복회 조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빛나는 이정표
독립군 양성 전쟁으로 국권 회복 도모
조선총독과 친일 관리·부호 처단 시도 

국가보훈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광복회 조직’을 ‘7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광복회는 1915년 음력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됐다. 이들은 연합, 의병운동의 무장투쟁과 계몽운동으로 실력 양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

1915년 12월 광복회는 만주 길림에 길림광복회를 설치해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점을 마련했다. 이어 전국 8도에 지부를 설치해 회원 확보 등 저변을 확대했다. 대구 상덕태상회, 영주 대동상점, 중국 단둥 안동여관과 삼달양행, 창춘 상원양행 등 상업 조직으로 위장한 국내외 활동 거점은 자금 조달과 연락 업무를 수행했다.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회원들이 직접 재산을 헌납하는 등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고 독립 의지 고취를 위해 친일파 처단에도 나섰다. 박상진 총사령은 조선총독 처단을 시도했고, 각 지부에서는 친일 관리·부호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8년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많은 회원이 체포되면서 사실상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김한종, 김경태, 박상진, 채기중 등 주요 인사들이 이때 순국했다. 그러나 광복회의 정신은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인 주비단과 광복단결사대 등으로 계승되며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광복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이정표였다. 의병운동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이라는 단일 목표 아래 통합해 활동하는 모범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조직망을 갖추고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는 등 3·1 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7월의 6·25전쟁영웅’ 롤랑 가브릴로프 육군 상사. 사진=국가보훈부
‘7월의 6·25전쟁영웅’ 롤랑 가브릴로프 육군 상사. 사진=국가보훈부


7월의 6·25전쟁영웅…롤랑 가브릴로프 육군상사 
화살머리고지전투서 활약한 공병소대장
1952년 유엔 프랑스대대 소속 참전 

중공군 초반 기세 꺾어 승리 이바지

같은 날 보훈부는 6·25전쟁 때 프랑스대대 공병소대장으로 화살머리고지전투 승리에 이바지한 ‘롤랑 가브릴로프 육군상사’를 ‘7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1926년 프랑스 암네빌르에서 태어난 롤랑 가브릴로프 상사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2월 프랑스 육군에 입대했다. 이후 1952년 1월 25일 유엔 프랑스대대 대대본부 공병소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프랑스대대는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돼 강원 철원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3일 화살머리고지를 방어 중이던 프랑스대대는 곧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경계를 강화하고, 고지 좌측 전초진지에 공병소대를 배치했다.

10월 6일 밤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 일대에 중공군의 집중 포격이 가해진 후 대규모 병력이 공병소대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가브릴로프 상사와 소대원들은 기관총·수류탄으로 끝까지 항전했지만 중공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밀려 결국 진지 내부로 침투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에 가브릴로프 상사는 대검을 뽑아 적에 맞서 백병전을 전개했다.

전투 중 보레이 프랑스대대장이 무전으로 “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하자 가브릴로프 상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대장님. 버텨낼 것입니다”란 마지막 통신을 남기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가브릴로프 상사를 포함한 공병소대원 20명이 전사했으며, 생존 병력은 고지 정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들이 중공군의 초반 기세를 꺾은 덕분에 프랑스대대는 이후 3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고지를 끝까지 사수하며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가브릴로프 상사는 프랑스대대의 용맹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탁월한 군인정신과 헌신을 기려 1계급 특진(중사→상사)과 함께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추서했다. 가브릴로프 상사의 고향 암네빌르에는 ‘롤랑 가브릴로프 상사 길’이 조성돼 그의 투혼을 기리고 있다. 노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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