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노구에도 전시 연설만 279번이나 했죠"

입력 2024. 02. 13   17:07
업데이트 2024. 02. 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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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엇갈린 평가에도…
이승만은 북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상징
북의 거짓 이데올로기로 비난·왜곡 핵심 인물 된 것
알려지지 않은 업적… 
토지개혁·여성 투표권 부여…힘없고 가난한 자 위한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하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 ‘신의 한 수’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 호오(好惡)가 엇갈리는 인물이야 많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만큼 극명히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이 또 있을까? ‘건국 대통령’ ‘국부(國父)’로 불리며 칭송받는 동시에 ‘친일파’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야유에 시달리는 이가 바로 이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이 전 대통령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이 왜곡에서 비롯됐다고 선언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누적 관객 수 32만 명(13일 현재)을 기록하며 때아닌 ‘이승만 열풍’을 불러일으킨 김덕영 감독은 이를 “진실의 힘”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8일 만난 김 감독은 지난 3년 동안 이 전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오해를 낱낱이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가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힘줘 말했다.
맹수열 기자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조종원 기자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조종원 기자

 

한강철교 폭파 전 이미 사람들 내보내…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야기하더라도 독재자, 친일파, 미국의 꼭두각시 같은 아주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었던 인물이에요. 그런데 막상 사실을 하나하나 규명해보니 전부 거짓말이었죠. 영화를 본 국민들이 충격에 빠지고 분노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감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김 감독이 이 전 대통령에 천착하게 된 것은 16년에 걸쳐 제작한 전작 ‘김일성의 아이들’의 취재 과정에서 기인한다. 6·25전쟁 이후 생겨난 북한 전쟁고아 5000여 명이 동유럽 각지로 보내진 사연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그는 신기한 장면을 목도하게 됐다고 한다.

“1995년 평양을 방문한 한 목사님이 평양 거리에서 목격한 것인데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자!’라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대에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30년도 더 지난 그때까지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구호가 북한 사회에 난무하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이승만이란 존재가 누구인지 연구를 하게 됐는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승만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거짓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죠.”

그렇다면 김 감독이 주장하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거짓말’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명확했다.

“이승만을 죽여야 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이승만이란 역사를 지워야 하고 그 존재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북한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한반도에서 자신들이 유일한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정부라는 것을 강조해야 했기 때문이죠. 광복 이후 6·25전쟁까지 이어진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립, 적화 통일의 야욕 등이 모두 이승만이란 존재에 의해 저지됐고, 파탄 났습니다. 북한에 이승만은 자유와 민주주의 체제의 상징이자 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 독재체제, 김일성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 이승만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퍼트린 거짓 이데올로기로 이승만은 지난 70년 동안 비난과 왜곡의 핵심 인물이 됐습니다.”

김 감독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여러 왜곡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으로 6·25전쟁 초기 서울 시민을 버리고 도망갔다며 비아냥거리는 뜻을 담은 ‘런(Run)승만’을 꼽았다. 그리고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힘줘 말했다.

“저도 어릴 때 부모님께 들었어요. 이 전 대통령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을 사수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다리를 끊고 도망쳤다는…. 그런데 최근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감청 보고서가 하나 나왔는데, 바로 앞의 그 말이 있다던 1950년 6월 27일 서울중앙방송 라디오 방송 원본 기록입니다. 그런데 방송에는 그런 말이 한마디도, 비슷한 말도 존재하지 않아요. 대신 ‘위기의 시기가 닥쳐왔다. 인민군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한반도는 위기다. 하지만 미군이 곧 돌아올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아라’라는 이야기만 있죠. 일종의 선무방송이거든요. 국민을 안심시키고 군인의 사기를 고취하는 당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한강철교 폭파’ 역시 오해가 있다고 강조했다. 폭파 전 이미 사람들을 내보냈다는 주장과 함께였다.

“한강철교 폭파로 800명이 죽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사망자는 있는데 부상자는 전혀 집계되지 않았어요. 보통 이런 사고가 생기면 사망자의 2~3배 이상의 부상자가 있어야 하고 먼 훗날에라도 정부에 보상을 청구하기 마련인데, 한강철교 폭파는 4·3 사건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달리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류석춘 교수가 이번에 아주 중요한 자료를 발견했어요. 바로 1950년 6월 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되기 전 다리 밑에 부교가 설치된 사진입니다. 다리 위에는 폭발물이 설치돼 있기 때문에 아래 부교로 사람들을 통행시킨 것이죠. 무작정 다리를 폭파한 것이 아니란 결정적 증거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수집한 김 감독에게 이 전 대통령은 어떤 인물로 자리 잡았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애국자’라는 한마디로 답했다.

“한반도의 밤을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남북이 극명히 갈립니다. 휘황찬란한 대한민국과 어둠의 세계인 북한. 우리가 지금의 번영을 누리는 것은 건국 1세대의 공로입니다. 그 중심엔 이 전 대통령이 있고요. 이 전 대통령이 벌인 모든 정책은 사실 ‘욕먹는 정책’이었어요. 자신의 인기를 위한 것이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죠. 국가 예산의 20%를 교육에 쏟아부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가난했던 정권에서 말이죠. 인적 자원의 소중함을 1950년대에 깨달은 이였습니다. 이 인적 자원 덕분에 대한민국은 산업·경제·문화적 측면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1957년 실험용 원자로를 만들기 위해 국비 장학생 200여 명을 미국으로 보낸 것도 미래지향적이고 선구자적인 행동이었어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근본적 토대를 만든 겁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뤄낸 ‘한강의 기적’이 기차라면 이 전 대통령은 레일을 만든 사람입니다.”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지난해 6월 미국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8월 2일 뉴욕 맨해튼 영웅의 협곡 카퍼레이드 모습. 김덕영 감독 제공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지난해 6월 미국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8월 2일 뉴욕 맨해튼 영웅의 협곡 카퍼레이드 모습. 김덕영 감독 제공


근대적 사상가이자 외교 전문가 이승만

과오야 어찌 됐든 이 전 대통령은 일제에 맞서 세계를 오가며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외교 전문가란 평가엔 이견이 없다. 그가 쓴 『독립정신』이나 『Japan Inside Out』등에는 사상가 이승만, 정치가 이승만의 탁월한 식견이 드러나고 있다. 김 감독 역시 이에 동의했다.

“청년 이승만은 곧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당시로선 굉장히 근대적인 사상가였습니다. 또 대통령 이승만은 부자를 위한 대통령이 아닌 힘없고 가난한 자, 여성을 위한 대통령이었어요. 대표적인 게 토지개혁입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한 뒤 결국 국가가 통제권을 다 가져간 북한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농민을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1948년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여성이 이렇게 제대로, 쉽게 참정권을 얻은 경우가 없어요. 치열한 갈등과 투쟁 끝에 쟁취했죠. 그래서 저는 이를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

김 감독은 이 전 대통령이 6·25전쟁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한반도의 평화와 이익을 위해서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항간의 말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절대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어요. 특히 국무부와의 대립이 심했죠. 기록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어요. ‘에버레디’라는 이름의 이승만 제거 작전도 검토했을 정도입니다. 이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며느리 조혜자 여사는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 ‘너희 아버지를 가장 속 썩인 사람이 미 국무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어요. 오히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함께 싸운 미군들, 맥아더 장군이나 밴 플리트 장군 등은 이 전 대통령을 열렬히 존중했죠.”

한미상호방위조약 역시 이런 갈등 속에서 ‘외교 전문가 이승만’이 던진 ‘신의 한 수’라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할 한국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었어요. 이건 이 전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에서 시작됩니다. 포로 협상은 전쟁의 마무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협상의 핵심인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하니 모든 정전협정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죠. 이에 연합군 역시 충격을 받았어요. 결국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한 각료들이 이 전 대통령을 회유합니다. 그때 그가 요구한 것이 경제적 지원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고, 거의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졌죠. 저는 이것이 ‘외교의 달인’ 이승만이 던진 신의 한 수라고 봅니다.”

이어 김 감독은 반대로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6·25전쟁 기간 이 전 대통령이 전선에 나가 군인을 독려하는 연설을 몇 번이나 했을 것 같습니까?” 어림잡아 100번 정도 하지 않았겠느냐는 대답에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기록된 것만 279회입니다. 전시 연설이라는 이름이었죠. 당시 그는 80세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어요. 당시 남성의 평균연령을 생각해보세요. 그 노구를 이끌고 전쟁터 한복판에서 군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연설을 279번이나 했어요. 이런 애국심을 제대로 기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는 영화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의 알려지지 않은 업적을 장병, 나아가 국민이 제대로 봐주길 당부했다.

“대한민국이 이룬 눈부신 발전이 그냥 우리가 잘나서 된 것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의 희생, 열정 없이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 전 대통령이 닦은 대한민국의 기틀에 대해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건국전쟁’은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대한민국의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 우리의 번영이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


박스오피스 3위…다큐 영화로 이례적 흥행 열풍 


지난 1일 별다른 홍보 없이 개봉해 13일 만에 32만 관객을 모으며 ‘이승만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영화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김덕영 감독은 3년에 걸쳐 국내외를 오가며 연구자들의 증언과 사료를 모았다. 이를 통해 그동안 ‘독재자’ 등으로 폄훼됐던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영화는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공과 대통령 이승만의 선구자적 행적을 추적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영화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라는 카피와 함께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오해를 사료에 기초해 반박하고 있다.

‘건국전쟁’은 현재 박스오피스 3위권을 기록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각계각층의 관람과 후기도 쏟아지고 있는 상황.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특성상 보기 드문 현상이다. 김 감독은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 전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다. 영화의 성공이 감독의 제작 의도와 바람의 실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답은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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