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왕족 출신…김춘추와 삼국통일 대업 이뤄

입력 2020. 12. 23   16:33
업데이트 2020. 12. 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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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신라 김유신 

폐왕족 출신 김춘추와 조우
삼국 역사의 축 바꿔놓으며
삼국통일 중추세력 맹활약 

 
단재 신채호 ‘외세 의존’ 혹평
학계 일반평가와 다른 의견도

경북 경주시 송화산록에 있는 흥무대왕(추봉) 김유신 묘. 신라 귀족 묘 중 최대 규모로 사적 제21호다.  필자 제공
경북 경주시 송화산록에 있는 흥무대왕(추봉) 김유신 묘. 신라 귀족 묘 중 최대 규모로 사적 제21호다. 필자 제공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로 우리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언론인이자 역사 저술가다. 만주 동창학교 교사 재직 시 단군·고구려·발해 중심의 조선사를 집필해 한국 고대사 체계화에 공헌했다. 단재가 일갈했다. “신라 김유신은 지용(智勇) 있는 명장이 아니라 정치가다. 평생 대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다.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동족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살상함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다.” 단재는 1936년 중국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역사를 풍미한 유명 인물의 공과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행적이나 사가들의 연구 결과로 평가된다.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인사들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동일인의 평가에도 사학계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김유신에 대해서도 단재 같은 시각이 있는가 하면 “당시는 고구려·백제·신라가 현재의 단일 민족 개념이 아닌 별개의 적국으로 대치했다. 국가 존립이 지상 과제였다”는 의견도 있다.

가야 왕족 출신 김유신(595~673)은 선대부터 신라인과 혼혈이었다. 6대 좌지왕(재위 407~421)은 여색을 탐해 인근 소국 왕녀와 각국 대신들의 딸 여럿을 후궁으로 들였다. 그중 신라 아찬(17관등 중 6등급) 도령의 딸 복수가 아들(7대 취희왕·재위 421~451)을 낳자 태자로 봉하고 복수는 왕후로 삼았다. 취희왕도 신라 각간 진사의 딸 인덕을 맞아 8대 질지왕(재위 451~492)을 출산했다. 질지왕은 가야 여인 방원에게서 9대 겸지왕(재위 492~521)을 얻었는데 겸지왕이 다시 신라 각간 출추의 딸 숙씨를 왕후로 들여 10대 구형왕(재위 521~532)을 낳았다.

구형왕은 가야 계봉의 딸 계화를 왕비로 간택해 김노종·김무덕·김무력 세 왕자를 뒀다. 구형왕은 가야 국운이 기울자 세 왕자와 왕비·왕족을 대동하고 신라 법흥왕(23대·재위 514~540)에게 투항했다. 법흥왕은 막내 김무력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딸 아양 공주를 시집보내 부마로 삼았다. 가야 왕족은 신라의 진골 귀족에 편입됐으나 조정 대신들의 차별로 조정 진출을 봉쇄당했다. 가야 유민 대부분도 신라의 하층 신분으로 전락해 고구려·백제 전쟁의 희생양이 됐다.

김무력은 아양 공주와의 사이에서 김서현을 낳았다. 김무력·김서현 부자는 신라 조정의 살벌한 감시 속에 구차한 목숨을 부지했다. 생존 계책은 오직 전투에서 승리해 무공을 세우는 길뿐임을 터득했다. 551년 김무력은 나제동맹 연합군이 점령한 고구려 영토를 백제 후미에서 기습해 신라의 독점에 기여했다. 554년에는 보복전에 나선 백제 성왕(26대·재위 523~554)을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추포해 참수했다. 그 공으로 김무력은 신주(新州) 도독이 되고 신라 정계의 막강한 군벌로 급부상했다.

아들 김서현은 용의주도했다. 아버지는 법흥왕 부마로 출셋길이 보장됐지만, 자신은 신라 군부의 일개 무장에 불과했다. 신라 왕녀와의 혼인이 절실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낭자 일행을 만났다. 진흥왕(24대·재위 540~576) 여동생 만호 부인의 딸 만명이었다. 김서현이 다가가 청혼했다. 만명은 김서현의 준수한 용모와 위풍당당한 장부 기질에 반했다. 둘은 주위를 물리치고 야합했다.

만명 아버지 숙흘종이 “김서현은 가야 폐왕족의 자식이다”며 만명을 광속에 감금하고 출입을 금지했다. 숙흘종은 입종(법흥왕 동생)의 아들로 이복 여동생 만호와 사통해 딸 만명을 낳았다. 숙흘종은 만명과 김서현의 혼인을 극구 반대했지만, 광 자물쇠가 벼락으로 부서져 만명이 탈출했다. 김서현과 만명이 만노군(충북 진천)으로 도주해 아들을 출산하니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자신의 출생 배경을 알고 난 후 신라 조정안에서의 신분 격상 방안을 고뇌하며 성장했다. 가야 왕족 가문 유지를 위해서는 무장의 길이 첩경임을 인지하고 풍월도(화랑도)에 입문했다.

신라 폐왕족 김춘추(602~661)도 가망 없는 미래 속에 연명하기는 김유신과 흡사했다. 김춘추 할아버지(25대 진지왕·재위 576~579)는 과도한 색탐으로 사도태후(24대 진흥왕비)한테 폐위당했다. 김춘추 아버지 김용춘(578~647)도 고립무원의 혈혈단신으로 조정의 이단아였다. 김춘추는 폐족된 진지왕계 복원을 위해서는 군사 조직 장악이 급선무임을 직감하고 풍월도에 입문했다.

유년 시절 김유신은 고구려·백제 침공으로 참담해진 신라 백성들을 목도하며 삼국통일의 야망을 키웠다. 김춘추는 수단·방법을 불문하고 왕권을 탈환한 뒤 신라를 강대국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무술에 걸출한 김유신과 처세의 귀재 김춘추의 조우는 삼국 역사의 축을 바꿔 놓았다. 둘의 꿈은 달랐지만, 상봉 즉시 의기투합했다. 김유신이 15세 풍월주로 낭도를 통솔할 때는 김춘추가 부장으로 솔선했다. 김춘추가 18세 풍월주로 화랑도를 선도할 때는 김흠순(김유신 동생·19세 풍월주)이 부장으로 보좌해 심복 무사들을 양성해 냈다. 뒷날 이들이 삼국통일의 중추 세력으로 맹활약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김유신은 둘째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낸 후 김춘추가 29대 무열왕(재위 654~661)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토록 했다. 첫째 여동생 보희도 무열왕 후궁으로 입궁시켜 신라 왕실 혈통을 가야 왕족과 결합시켰다. 김유신은 상대등을 제수받고(660) 신라 전(全) 귀족을 대표하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해 7월 백제 계백 장군과의 황산벌(충남 논산) 결전에서 당나라군과 합세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 멸망 비사에는 김유신의 책략이 전해온다.

백제 대신인 임자가 신라 부산(夫山) 현령으로 있는 조미압을 포로로 잡아 종으로 부렸다. 김유신은 조미압에게 첩자를 보내 신라의 간자가 될 것을 종용했다. 조미압은 임자에게 “양국의 미래와 존망을 알 수 없으니 백제가 망하면 임자가 김유신을 의지하고, 신라가 망하면 김유신이 임자에게 의탁토록 하자”는 김유신의 계책을 전했다. 임자는 선뜻 응하고 조미압을 백제 조정에 무상 출입시켰다.

조미압에게 ‘백제는 군인들이 나태하고 전의를 상실해 왕명도 거역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김유신이 백제 합병을 서둘렀다. 김인문(30대 문무왕 동생)을 당나라에 급파해 당군 출병을 간청했다. 당태종(재위 626~649)이 13만 대군을 보내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668년 7월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는 지병 악화로 후방에서 지휘했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 79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김유신은 정부인과 여러 첩실을 맞이해 자녀가 많았다. 후손들은 김유신과 달리 폐쇄적인 신라 조정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귀족 사회에서 소외됐다. 사후 160여 년 뒤인 42대 흥덕왕(재위 826~836) 때 흥무(興武) 대왕으로 추봉됐다. 신하가 왕으로 추봉된 사례는 세계에서 김유신이 최초인 것으로 사학계는 파악하고 있다.

봉분 하단 12지신상 중 진(辰·용)상. 필자 제공
봉분 하단 12지신상 중 진(辰·용)상. 필자 제공

사적 제21호로 지정된 김유신 묘는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 7-10 송화산 남쪽에 건좌(북에서 서로 45도) 손향(동에서 남으로 45도)의 동남향으로 용사돼 있다. 역대 귀족들 묘 중 최대 규모로 봉분 직경 16m, 높이 5.5m의 원형 봉토분이다. 횡혈식 석실분 묘제로 봉분 하단에 호석을 설치하고 탱석마다 십이지신상을 부조(浮彫)했다.
<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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