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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일본에 건넨 하사품… 양국위상 보여준 유물

기사입력 2017. 11. 06   16:23 입력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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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일본의 국보 ‘칠지도’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

‘하사품’ ‘진상품’ 논란에

칠지도에 새겨진 문구로

백제왕 하사설이 타당

 

왜곡된 역사인식의 폐해

올바른 역사교육 필요성 확인

 




최근 한·일 관계는 독도 문제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사 왜곡 문제 등으로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다. 이 같은 문제의 뿌리에는 고대 한·일 관계에 대한 양국 역사 이해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그 쟁점의 중심에 있는 유물 중 하나가 ‘칠지도’다.


칠지도는 칼 몸길이 66.5㎝, 손잡이에 들어가는 슴베 부분 8.4cm로, 전체 길이 74.9㎝의 칼이다.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마치 소뿔이나 나뭇가지처럼 꺾인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유물이 1935년 부여 궁남지 군수리 절터에서도 발견됐다고 전하지만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또한, 정확한 용도와 명칭에 대해서도 역시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 남아있는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돼 전해왔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고대 일본 건국 때 사용됐다는 전설적인 칼을 모시는 신궁으로 야마토 정부의 무기고 역할도 했던 곳이다.

칠지도는 물품 목록에 ‘여섯 갈래 창’이란 뜻의 ‘육차모’로 기록돼 있다. 새해 첫 모종을 심는 의식에서 제구로 사용됐다고도 전한다. 칠지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1874년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된 스가 마사도모(菅政友)가 이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는 이 칼을 살펴보다가 몸체 부분 양면에서 금으로 상감된 글자를 발견했고, 10여 자만 판독한 후 ‘이소노카미 신궁 보고 소장 육차도명’이란 메모를 남겼다. 1892년 도쿄제국대학 호시노 히사시 교수가 이 메모를 받아 조사하고는 이것이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칠지도라고 발표했다. 이후 스가는 칠지도 녹 제거작업을 거쳐 명문(銘文)을 판독했고,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을 확인했다.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칠지도 명문은 앞면 34자, 뒷면 27자 총 61자다. 녹이 슬고 일부가 떨어져 글자 판독이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의견은 일치한다. 앞면에는 ‘태△사년오월십육일 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출(생) 벽백병의공공후왕△△△△(작)상’이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선세이래미유차도 백제왕세자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시후세’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이렇다.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 같은 명문이 확인되자 한·일 역사학계의 논란은 증폭됐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칠지도라는 표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는 서기 249년 왜의 신공황후가 신라와 임나 7국을 평정하고 탐미다례를 백제에 하사하니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제가 칠지도와 칠자경을 바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를 입증하는 듯한 유물이 발견되니 일본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일본은 이를 통해 『일본서기』의 신뢰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했고, 특히 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 정벌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정설화했다. 그리고 나중에 조선침략의 역사적 근거로도 활용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긴다. 칠지도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정말 백제가 왜왕에게 바치려고 칠지도를 만든 걸까? 이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이와 반대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그리고 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이다.

먼저, 첫 번째 설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관련 기사를 염두에 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매우 왜곡됐다는 데에는 학자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어서, 이는 오늘날 일본 외에 다른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설은 명문에 동진의 연호인 태화가 사용됐다는 점과 뒷면의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적지 않고, ‘성진’보다는 ‘성음(聖音)’일 개연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결국, 칠지도 문제는 ‘제후국의 왕’ 문구가 있는 점, 왜왕의 이름 ‘지(旨)’가 거명된 점, 칼을 준 사람이 왕세자일 가능성이 큰 점, 그리고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백제왕 하사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물품으로 고대 한·일 관계의 성격과 양국의 위상을 제대로 보여준 대표적 유물이다. 한때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에 왜곡 활용돼 올바른 역사교육과 이해가 중요함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역사유물이기도 하다.

향후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한·일 관계와 상생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조 법 종 교수 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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