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영도교, 영원한 이별의 다리
종로구 숭인동·중구 황학동 사이
조선 초 돌다리 2005년 콘크리트 복원
다리 지나면 도성민 장례 위한 동망산
‘영원히 헤어지는 다리’ 성종이 직접 써
유배길 오른 단종 건넌다는 소식에
어린 왕비 달려가 목 놓아 울고
아침저녁 언덕에 올라 영월 향해 기도
서울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 사이에 영도교(永渡橋)가 있다. 청계광장 기준으로 17번째 다리다. 조선 초기에 돌다리로 세워졌으며 영조 36년에 수리 중이던 수표교를 대신해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넉 자를 새긴 표석을 세워 준천의 기준으로 삼았다(『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6일).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없어졌다가 2005년에 콘크리트로 복원됐다.
조선 초에는 숭인동·황학동 일대가 흥인문(동대문) 밖 2리 지점으로 ‘왕심평(旺尋坪)’이라는 벌판이라 이 다리 이름도 처음에는 왕심평대교였다. 한양 흥인문을 지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다리여서 통행량이 많았다. 영도교에서부터 아차산 전농리까지가 왕십리(往十里) 구역이었다(『만기요람』). 왕도 뚝섬 쪽 한강으로 갈 때면 이 다리를 지났다. 중종이 대모산 태종의 능을 참배하려 한강을 건너가는 행차가 있자 왕세자는 창경궁 홍화문에서, 대신들은 이 다리에서 왕을 지송(祗送)했다. 왕을 호송하지 않고 한양에 남는 백관은 이 다리에서 왕의 가마를 떠나보냈다(『중종실록』 23년 10월 12일).
『연려실기술』은 영도교 돌다리를 “한 중이 놓았다”고 쓰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중들이 건물·교량 건설에 자주 동원됐다. 구보는 중들이 사찰을 지으면서 건설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던 까닭이었을 것으로 여긴다. 영도교를 놓은 중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중랑천에 살곶이다리(箭串橋)도 놓았다.
‘영도교’라는 이름은 성종이 손수 지었다(『용재총화』). 다리 머리에 성종의 친필 ‘영도교(永渡橋)’ 석 자를 새긴 비석이 있었다(『동국여지지』). ‘영원히 헤어진다’는 뜻의 ‘영도’라고 부른 데는 이 다리 위로 상여들이 많이 지나간 까닭으로 구보는 유추한다. 광희동 수구문을 지나 영도교를 건너면 도성 사람들의 장례를 위한 ‘동망산(東邙山)’이 있다(『서계집』).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영도교를 대면하고 비감에 젖어 시를 남겼다.
“목숨을 아껴도 오래 살기는 텄고/ 죽음을 꺼려도 한 번은 찾아오니/ 영도교 옆 들꽃 길이여/ 다리 건너가 돌아올 이 그 몇일까.”
영도교를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여긴 인식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 계곡 장유(1587~1638)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영도교 아래로는 동쪽으로 물 흐르고/ 다리 위론 날마다 상여가 지나가네/ 가련타 사람 목숨 흐르는 물 같나니/ 한번 가면 그만인 걸 어떻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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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사람들은 한양의 동쪽 지역에 산소를 많이 썼기 때문에 영도교 통행이 잦았으나, 존재의 성격 탓에 늘 꺼림칙하게 여겼던 듯하다. 어느 고관이 지나가다가 ‘영도교’가 적힌 빗돌을 보고선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그 빗돌을 무너뜨리고 간 일화도 전한다(『서계집』). 어느 지점을 지나면 기존과는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곳으로 들어서게 된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는데 옛사람들에게는 영도교가 그러했을까 구보는 생각해 본다.
‘영도교’라는 다리는 중국에도 있다. 절강성 영가현 암두진에 있는 게 대표적인데 송대 명승 설암(雪庵)이 1197년 지었다. 단순한 구조에 견고함을 갖춘 석교인데 깨달음을 얻으려 속세와 절연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전해진다. 구보는 동양의 ‘영도’에서 그리스 신화의 ‘레테(Lethe)’를 연상한다. ‘망각의 강’이라 부르는 존재다. 망자가 저승으로 가기 위해 꼭 건너야 하는 강으로 묘사된다. 그 강을 건너면 이승에서의 시간들은 잊힌다. 영원한 이별의 강인 것이다.
구보는 영도교를 건너 낯설고 물선 영월 땅으로 가야 했던 소년 왕을 떠올린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14세에 유배길에 올랐던 그 역시 예외 없이 영도교를 건너 강원도로 향했다. 숲이 울창해 ‘검은 땅(黑土)’이라 불린 강원도가 소년에게 절망과 외로움을 안겼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가 있었다. 송씨는 신분이 추락한 상태로 창신동 낙산 언저리에서 살아야 했다. 단종이 영도교를 건너던 날 소문을 들은 송씨가 영도교를 찾아 목 놓아 울었다는 이야기가 사실무근 같지는 않다고 구보는 생각한다.
1910년대 성 베네딕트수도원 선교사들이 촬영한 사진에는 산소들이 즐비한 광희문 바깥 언덕 너머로 멀리 청계천과 영도교가 담겨 있다. 그 거리쯤인 낙산 자락에서 행렬을 지켜보다 달려갔을 송씨의 비애를 감지하게 해준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영도교’라는 이름이 단종과 송씨의 비극적 스토리를 반영했다고 여겼다. 성종도 그 사연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그리 지은 걸까 구보는 짐작해 본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데는 시공의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청계천 영도교와 레테의 강이 그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같은 이별의 강이라도 한쪽은 완전히 망각하고, 다른 쪽은 영원히 기억하는 매개가 된다. 송씨는 창신동에 기거하며 죽을 때까지 영도교를 넘어 멀리 가신 님을 그리워했다. 낙산에 지천이던 지초와 자주동샘의 샘물로 염색을 하며 호구를 해결하면서도 아침저녁마다 언덕에 올라 남편이 숨지고 묻힌 동쪽 영월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 바위는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후세의 심금을 울렸다.
영조 임금은 특히 각별했다. 송씨가 노년에 기거하던 절집 정업원 구기(舊基·옛터)에 특별히 비각을 짓게 하고 어필을 내렸다(『승정원일기』 영조 47년 8월 28~29일). 또 건립에 공이 있다며 호조판서인 번암 채제공에게 포상을 내렸다(『승정원일기』 영조 47년 9월 6일). 비각이 완성되던 날엔 몸소 현장을 찾아 전배하고, 현판에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오리.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며 비애의 심경을 남겼다. 바위에는 ‘동망봉’ 세 글자를 친히 내려 새기도록 했다.
구보는 그 자신이 무수리의 소생이었던 까닭에 어릴 때부터 겪어야 했던 서러움의 기억이 타인의 슬픔도 알아보고 껴안도록 하는 더듬이 역할을 한 게 아니었을까 여긴다. 아들 사도세자와의 악연 탓에 냉혹한 캐릭터로 비쳤지만 영조에게도 콕 찌르면 눈물이 쏟아지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구보는 선인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로 여겼던 공간을 무심히 가로지르는 지금의 사람들에게서 빛이 바래진 ‘영도’라는 이름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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