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미국 독립전쟁과 아메리칸 클래식의 태동
억눌린 꿈과
욕망의 Black Tea
뜨거운 선율이 되어
아메리카 적시다
英 무리한 전쟁에 재정 압박 시달리자
美 식민지에 세금 폭탄 주민들 불만 고조
보스턴 차사건 일으키며 독립전쟁 시작
학습된 음악가·정형화된 작곡 없던 미국
빌링스 ‘샤론의 장미’ 홉킨슨 ‘조약’ 등장
20세기 초 아이브스 ‘홀리데이 교향곡’
독립과 승리 축하…미국식 클래식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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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획을 그은 전쟁 중 하나가 미국 독립전쟁이다. 식민지 아래에 있던 13개 주와 영국이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약 8년간 지속한 전쟁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이 있었던 날이다. 하지만 독립선언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개척은 1607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의 식민지화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무리한 세금 부과가 미 국민 자극
미국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영국의 무리한 과세정책이 주요 원인이었다. 영국은 1740년부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56년에는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재정이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여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재정적 부담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에 영국은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관세를 매기는 한편 식민지에서 발간하는 신문, 일간지 등 출판물에도 간접세인 인지세를 부과했다. 과세 부담이 커진 것에 불만도 높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인지세였다.
또한 당시 미국 식민지 사람들은 비옥한 중서부로 개척을 시도했으나 영국은 ‘인디언 보호구역’을 설정해 이를 차단했다. 이에 반발이 심해졌고, 인디언과 미국 식민지 사람들 간 자주 갈등이 빚어지자 영국은 군대를 파견해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병영법’을 만들어 미국 식민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는데, 이로 인한 반발도 증폭됐다.
‘보스턴 차사건’으로 불만 표출
결정적으로 미국 식민지는 많은 홍차를 수입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네덜란드와 밀무역 방식으로 거래했다.이를 영국이 자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거래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밀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날벼락을 맞게 됐다.
그러던 중 1773년 매사추세츠만에 정박해 있던 영국 국적의 동인도회사 상선을 100여 명의 무리가 덮쳐 많은 양의 홍차를 바다에 던지는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인들이 여기저기서 홍차를 태우거나 배를 습격했다. 미국 전역에서 억눌렸던 억압과 부당한 관세정책 등에 관한 불만이 불붙었다. 나아가 이런 움직임은 미국의 독립의지를 자극하는 도화선이 됐다. 여담으로 미국인은 보스턴 차사건 이후 홍차를 배척하고 대신 커피를 선호하게 됐다고 한다.
크게 당황한 영국은 1774년 함대를 보내 보스턴항을 폐쇄하는 한편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강제 해산시켰다. 또한 각 주의 자치권을 영국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바꾸려 하자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다. 결국 1775년 4월 매사추세츠만 근교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 군대와 미국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했다.
이 교전에서 영국군은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775년 5월 13개 주 대표가 모여 대륙회의를 했고, 각 지역의 민병대를 규합해 ‘대륙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 장군을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독립활동이 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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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총사령관으로 독립 쟁취
1776년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지역의 퀘벡전투에선 대륙군이 패하기도 했으나 트렌턴과 프린스턴전투에서 이기면서 대륙군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777년 10월에는 영국군이 뉴잉글랜드 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감행했으나 1778년 새러토가전투에서 패하면서 이런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더욱이 이 전투의 결과로 영국을 견제하던 프랑스가 대륙군과 동맹을 맺었고, 스페인도 동맹국으로 참전하면서 영국은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됐다.
1780년 영국은 킹스마운틴전투와 카우펜스전투에서 패배한 데 이어 1781년 요크타운으로 철수해 탈출을 시도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영국은 프랑스와 대륙군의 연합 공격으로 무릎을 꿇고 만다. 마침내 요크타운전투를 마지막으로 미국 독립전쟁은 끝이 났고,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은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독립전쟁 시기 미국식의 애국적 음악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때는 음악사적으로 보면 유럽에선 바로크 음악에서 고전주의 음악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그 시기에 제대로 학습된 음악가도 없었고, 정형화된 형식을 갖고 작곡하거나 쓰임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럽처럼 궁정이나 교회, 귀족이 중심이 된 클래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윌리엄 빌링스(1746~1800)와 프랜시스 홉킨슨(1737~1791)은 이 시기 활동한 미국 최초의 작곡가들이다. 이들은 찬송가·애국가 등 종교음악의 전통과 민요풍의 노래로 독립을 위한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승리를 축하하는 등 혁명을 주제로 표현했다. 빌링스의 노래로는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 등이 있고, 홉킨슨의 곡 가운데는 ‘조약(The Treaty)’ ‘케그스전투(The Battle of the Kegs)’ 등이 유명하다.
찰스 아이브스의 ‘홀리데이 교향곡’
미국에서 클래식 음악의 한 획을 그은 작곡가는 찰스 아이브스(1874~1954)다. 그는 다소 괴팍한 면도 있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보험업에 종사했고 작곡도 하는 등 활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특히 어떤 형식에 갇혀 있기보다 자율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의 작품 중 ‘아메리카 변주곡(Variations on America)’은 1892년 미국 독립기념일에 연주하기 위해 작곡한 곡이다. 교향곡 ‘뉴잉글랜드의 휴일(New England Holiday·일명 홀리데이 교향곡)’ 3악장 ‘7월 4일(Fourth of July)’은 1913년 독립기념 주일을 기념해 작곡한 곡이다.
아이브스의 ‘홀리데이 교향곡’은 소년 같은 개구쟁이의 순수함이 짙게 묻어난다. 4개의 악장은 각각 다른 주제와 형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를 불협화음의 특징을 살린 작곡을 한다고도 평가한다. 1악장은 ‘워싱턴의 생일’, 2악장은 ‘장식의 날’, 3악장은 ‘7월 4일’, 4악장은 ‘추수감사절과 조상의 날’로 구성됐다. 전체 연주시간은 30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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