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주권, 대한의 이름으로 지켜내다

입력 2025. 09. 16   17:32
업데이트 2025. 09. 16   18:01
0 댓글

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세계 속의 독립운동 거점 ⑧ 중국 중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1995년 충칭 청사 복원
독립운동 진영 통합 추진한
김구 선생 머물던 치장 거주지 터
한국광복군·조선의용군
숙소·훈련지 흔적 곳곳에…

중국 중부지역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관련 주요 사적이 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이후 항저우·창사·광저우·충칭 등으로 이동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 중부지역 충칭에서는 1940년 9월부터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있었다. 광복군 총사령부도 충칭을 비롯한 중부지역 일대에 사령부, 훈련지, 초모활동지 등을 뒀다. 광복 80주년 연중기획 시리즈 ‘세계 속 독립운동 거점’ 이번 지면에서는 충칭, 시안, 치장, 옌안, 청두 등 중국 중부지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사적지를 소개한다. 서현우 기자/사진·도움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내부 모습.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내부 모습.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사용했던 건물이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성립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총사령부는 시안에 설치했다가 1942년 충칭으로 옮겼다. 총사령부는 1991년 광복군 유적조사단에 의해 발견됐고, 1999년 총사령부 건물의 역사적 중요성에 걸맞게 표지석 설치가 추진됐다. 또 독립기념관은 2003년 총사령부 건물 훼손에 대비해 정밀 실측했다. 충칭시 정부는 한·중 관계를 고려해 총사령부 건물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오다가 안전상 문제로 2015년 철거했다. 이후 양국 협의를 거쳐 2018년 3월 건물 복원을 결정, 이듬해 완료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청사.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청사.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청사(연화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국 충칭지역으로 청사를 옮겼다. 청사는 정부 각료들이 모여 국가 대소사를 협의·논의하고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장소였다. 충칭지역에서 청사는 처음 양류가에 있었지만 일제의 폭격 등 여러 어려움이 생겨 석판가, 오사야항 등으로 이동했다. 1944년에는 연화지로 다시 옮겼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이곳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광복을 맞은 곳인 셈이다.

청사 건물은 1929년 건립돼 호텔로 쓰이다가 장제스의 도움으로 1944년 하반기부터 임시정부가 사용했다. 광복 이후 1994년 6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인민우호협회가 청사 복원협정을 체결했고, 이듬해 8월 복원을 완료해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보수와 전시 보완이 이어졌고, 지난달에는 개관 30주년 기념식이 양국 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충칭 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 터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한국광복군 1지대로 개편돼 그 본부를 아가원자에 뒀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직후부터 중국 전선에 파견돼 중국군의 대일항전에 참전했으나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일부 대원은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들을 제외한 잔류 대원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 1지대로 편성했다. 지대장은 김원봉이 임명됐다. 그 터는 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장제스 면담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제스에게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던 장소다. 당시 임시정부의 요청은 중국국민당에 받아들여져 우리의 독립 문제가 카이로회담 2일 차인 1943년 11월 23일 미·중 정상 만찬 자리에서 논의됐다.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제안했고,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장제스의 면담지는 군사위원회 건물이었다. 충칭에 군사위원회 건물로 알려진 곳은 행영과 예당 등 2군데가 있는데, 그중 면담지는 행영의 군사위원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청사 전시실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청사 전시실


치장 김구 거주지 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9년 5월 치장에 자리 잡고, 1940년 9월까지 머물렀다. 김구가 치장에 머문 기간과 관련해선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1939년 8~9월과 10~12월 등으로 추정된다. 김구는 김원봉과 함께 독립운동 진영 통합을 추진해 1939년 8월 27일 치장에서 통일회의가 개최됐다. 또한 1939년 10월 임시 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터는 현재 모두 철거된 상태다.


한국광복군 설립 기념사진.
한국광복군 설립 기념사진.

 

한국광복군 대원들.
한국광복군 대원들.



한국광복군 초모활동지(남천집중영) 

충칭 파남구 유가만에는 중국군사위원회가 운영했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남천집중영남천군정부 포로수용소였다. 여기엔 300명 정도의 일본군 포로가 수용됐는데, 일본인뿐만 아니라 일본군 소속 한국인도 있었다. 이들은 지원병, 학도병, 징병 등으로 일본군에 예속된 뒤 포로로 잡혔다가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본군을 탈출한 청년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인 포로들을 광복군으로 선발했다. 이곳은 2009년 충칭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다. 포로수용소로 추정되는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시안 한국광복군 제2지대 본부 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2지대는 이범석 지대장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편제는 본부 격인 총무조와 정훈조로 나뉘었고, 그 산하에 3개 구대가 설치됐다. 각 구대에는 3개 분대가 있었다. 창설 직후 시안시내에 총사령부와 함께 주둔하다가 총사령부가 충칭으로 이전한 뒤 시안 외곽 두곡진으로 옮겼다. 당시 건물은 없어진 상태다. 2014년 5월 두곡진 한국광복군 본부 터에 광복군 2지대 표지석 기념공원이 건립됐다.


시안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본부 터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는 1939년 11월 30여 명의 청년이 주축이 돼 충칭에서 조직됐다. 결성 과정에서 김구의 승인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별도의 독자적 조직체였다. 결성 직후 이름 그대로 전지공작을 위해 중국군 10전구 사령부가 있는 시안으로 이동해 자리 잡았다. 이후 1941년 1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본부가 사용했던 건물의 원형은 없어졌다.


시안 한국광복군 제2지대 OSS 훈련지(미타고사)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미 전략첩보국(OSS) 훈련지를 시안 남오대산 ‘미타고사’라는 사찰 근처에 설치했다. OSS 훈련은 50명을 단위로 3개월 과정이 펼쳐졌다. 1945년 8월 4일 1기생 훈련이 완료됐다.


시안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거주지 터 

1942년 4월 한국광복군 제1·2·5지대가 2지대로 통합되고 충칭에 머물던 이범석이 그해 10월 시안으로 건너오면서 광복군 2지대 편제가 이뤄졌다. 시안 장안현 두곡진의 가옥이 이때 이범석이 머물던 숙소였다. 이범석은 1920년 10월 김좌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적 군관대장으로 활약했다. 19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된 뒤 참모장을 거쳐 2지대장에 임명됐다. 숙소는 2지대 본부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이었다.


옌안 조선의용군 구지 표지석.
옌안 조선의용군 구지 표지석.

 

옌안 조선의용군 대원 숙소에서 바라본 천구촌 전경.
옌안 조선의용군 대원 숙소에서 바라본 천구촌 전경.


옌안 조선의용군 주둔지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생도를 비롯한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약 5개월간 주둔했던 곳이다. 조선의용군의 옌안 첫 주둔지였던 천구촌은 옌안시를 가로지르는 연하를 따라 동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있다. 천구촌은 산간마을로, 천구촌 연하대교 건넛마을 입구 산 중턱에 조선의용군의 당시 거처로 추정되는 요동(窯洞·토굴집)이 8~9개 남아 있다.

2007년 5월 옌안시에서 건립한 조선의용군 구지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대원들의 숙소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동에서 보면 앞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옌안 항일군정대학 터 

중국 항일군정대학은 1936년 6월 개교한 학교다. 『아리랑』의 저자 김산이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강의했고 1938년 10월 조선의용군 제2지대 대원 30여 명이 이곳에서 수학했다. 옌안 항일군정대학 건물은 파괴돼 현재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청두 김규식 활동지(사천대학) 

청두 사천대학은 1704년 설립된 금강서원과 1875년 세워진 존경서원에서 출발한 여러 교육기관이 몇몇 대학으로 정리됐다가 1931년 국립사천대학으로 통합된 것이다. 사천대학과 관련 있는 독립운동가는 유림, 김규식, 김광 등이 있다. 그중 김규식은 1935~1936년 무렵부터 사천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간부였던 김광은 성도사범대학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유림은 성도사범대학의 전신인 성도고등사범학교를 다녔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