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스파이로 인한 국가 피해는 얼마나 될까?
ASIO, 연간 스파이 피해액 발표
방첩활동 예산의 최소 6배 이상
국방 종사자 포섭·위장 취업 등
미적발 활동 포함 땐 규모 더 커
국가 자산 막대한 손실 줄이려면
취약점 막는 데 미리 투자해야
외국의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국가적 피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살인, 강도, 사기 등 일반 형사 범죄나 테러 등은 행위와 그로 인한 손실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와 달리 외국의 스파이 활동은 행위 자체가 드러나지 않고, 확인된 경우에도 피해가 추상적인 경우가 많아 손실을 금액으로 산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외국 스파이 피해 금액 처음 추산
국가기밀 유출로 인한 주권 침해, 전략적 손실, 전투역량 상실 등 잠재적 피해를 금전으로 계산하기는 어렵다. 비교적 산정하기 쉬워 보이는 산업기밀 유출의 경우에도 경영상 비밀 누설에 따른 경쟁력 상실 등을 제대로 계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호주 정보기관이 외국의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국가적 피해 금액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30일 호주 방첩기관인 호주 보안정보국(ASIO) 국장 마이크 버지스가 연례 강연에서 외국 정보기관의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피해액이 연간 125억 호주달러(약 11조3000억 원)에 달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번 발표는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국가적 피해를 금액으로 산정한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ASIO의 이번 발표는 호주범죄연구소(AIC)와 함께 2023~2024 회계연도 기간 외국의 스파이 활동에 따른 비용을 계산한 추정치로, 엄격한 수치와 보수적 계산법을 택했다고 한다. 인지하지 못한 스파이 활동까지 포함하면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피해액 중 20억 달러는 사이버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산업기술과 영업비밀 유출에 따른 것이다. AIC는 스파이 대응을 위해 호주 경제 전체가 부담하는 비용은 연간 수백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방첩 업무를 수행하는 ASIO의 최근(2024~2025 회계연도) 예산이 5억9400만 호주달러(약 5350억 원)로 알려진 점을 감안하면 ASIO의 방첩활동은 가성비(?)가 꽤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버지스 국장은 외국의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손실이 금전적 피해에 그치지 않음을 강조했다. 2022년 비공개로 러시아 정보요원 여러 명을 추방한 사실을 포함해 지난 3년간 24건의 심각한 외국 스파이 활동을 적발했다고 공개했다. 그는 또한 지난 3년간 적발 건수가 이전 8년간의 숫자보다 많다면서, 더욱 치열해진 국가 간 경쟁에서 각국이 전략적·전술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보다 강화된 정보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호주 방첩기관 ASIO의 경고
그동안 외국 정보활동에 따른 위험성을 여러 차례 경고한 버지스 국장은 이번에 가장 구체적으로 피해 규모를 밝히고 국민에게 방첩 경각심을 촉구했다. 그는 최근 각국이 정교한 방법으로, 전례 없는 수준의 정보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정치인, 사회 지도층, 공무원, 군인, 학자들을 포섭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무역 협상 관련 서류를 입수하기 위해 공무원 포섭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포섭된 호주인과 그 가족에게 비밀정보 입수를 위해 공직에 지원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으며, 유사시 파괴할 목적으로 군사시설을 정찰하고, 핵심 기간시설의 위치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고 한다.
방위산업체의 설계도 입수를 위해, 전·현직 국방 분야 종사자 포섭을 위해 사이버 공격, 직접 접촉, 기술적 수집 등 모든 수단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여행 중인 국방 분야 종사자의 숙소를 비밀리에 뒤졌으며, 회의장에서 위장 신분으로 접근해 내부 자료를 빼내 갈 수 있도록 고안된 USB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핵잠수함 등 AUKUS(미국·영국·호주의 안보동맹)와 관련된 군사시설과 장비 관련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적극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기술 정보 수집도 확대하고 있는데 특히 호주가 앞서 있는 친환경, 남극 연구, 핵심 광물, 희토류 추출과 처리기술 등을 빼내기 위해 학자, 기업인, 언론인 등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심지어 원예시설을 방문해 20년간 연구해 개발한 희귀 과일나무 가지를 몰래 꺾어간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 공공 부문과 사기업이 추진하는 각종 사업 프로젝트 및 투자 협상에 관련된 정보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공무원을 포섭해 행정 전산망을 통해 자국의 반체제 인물 관련 정보를 수집하거나, 언론 보도를 조작하기 위해 언론사 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호주 국민 중 7000여 명은 SNS에 자신들이 국방 분야 종사자임을 노출했다. 400여 명은 노골적으로 AUKUS와 관련된 일을 한다고 밝혔고, 2500여 명은 자신이 비밀취급인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했으며, 1300여 명은 안보 부처에서 일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는 이런 행동이 너무나 위험한 것이며, 자발적으로 외국 정보기관의 표적이 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경고했다.
정보 위협 구체화로 경각심 높여야
세계 모든 나라에서 정보기관들이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 정보활동을 통해 얻는 이익이 정보기관의 운용비용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나라도 정보기관을 운영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미국의 CIA를 비롯한 18개 정보기관으로 구성된 정보공동체는 2024년 기준 연간 765억 달러(약 106조 원)의 압도적인 정보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300억 달러의 국방정보(MIP) 예산을 제외한 순수 국가정보 프로그램(NIP)만을 추산했을 경우다. 미국의 막강한 힘이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수치다.
정보력은 국력의 핵심 요소지만 국력의 차이가 정보력의 차이를 가져오는 이유기도 하다.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가 냉전 시대 서방 각국에서 운용하던 스파이 명단 등 핵심 정보가 담긴 세기적 정보문건인 ‘로젠홀츠 파일’을 독일 통일 시기에 서독 정보기관이 아닌 미국 CIA가 입수하게 된 것도 “돈 많은 곳에 정보가 간다”는 말을 입증해 준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에서 스파이로 인한 국가적 피해액을 추산한 통계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인구가 호주의 두 배에, 북한의 대남 공작이 상수로 존재하며, 지정학적 위험성도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호주보다는 훨씬 큰 금액이 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도 외국의 스파이 활동 통계를 보다 정교하게 산정해 방첩에 대한 국가적 자산 배분이 적절한지를 살펴볼 만하다. 보이지 않는 정보활동의 피해를 산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서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고, 방첩 자산의 효율적 배분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수치화된 피해를 알려 국민들의 방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호주 ASIO의 버지스 국장이 외국의 정보적 위협을 너무나 안일하게 인식하는 일부 공직자를 지적하며 “스파이 활동이 더 이상 기묘한 이야기나 로맨틱한 소설이 아니라 현존하고, 실재하며, 국가생존의 큰 위협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그저 먼 나라 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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