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은 ‘serviceman’,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봉사가 점점 당연시되고, 무언의 희생으로 고정되고 있다. 대한민국 직업군인의 경우 노조가 없다. 군대라는 특수조직의 특성 때문이란 설명은 익숙하다. “군인이 무슨 노조냐”는 반문이 늘 따라붙는다. 되물어보자. 왜 군인만 예외인가. 노조가 없다면 최소한 그들이 목소리를 낼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군인의 일은 노동이다. 그것도 큰 위험성과 고강도의 훈련, 예측 불가능한 생활이 결합된 고난도의 노동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근무조건이나 복지는 사회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권리를 요구할 창구는 없다. 문제를 제기하면 충성심을 의심받고,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지휘체계를 흔드는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침묵만이 살아남는 전략이다. 이러한 구조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군인의 전문성은 존중받고 있는가?”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군인과 국가』에서 군인을 단순한 명령 수행자가 아닌 고도의 윤리와 기술을 갖춘 전문가 집단으로 정의한다. 그는 군이 시민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전문성에 기반한 자율성과 존중이 병행돼야 군대가 정치화되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된다고 본다.
지금 대한민국 군대는 오히려 헌팅턴이 경계한 ‘주관적 문민 통제’ 아래 있다. 군인의 현실은 정치 논리에 가려지고, 전문직으로서 자율성은 제도적으로 제한된다. 이 상태에서 군의 사기와 인재 유치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군대의 특수성과 위계질서를 고려할 때 군인에게 전면적인 단체행동권(예컨대 파업권)을 보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형태의 집단적 의사표현을 봉쇄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협의기구, 직역별 대화채널, 제한적 노동조합 모델 등 직업군인들의 현실을 사회와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독일, 노르웨이,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파업은 금지하되 군인노조를 인정하거나 협의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핵심은 통제와 자율의 균형이다. 이 균형은 가능하고, 오히려 지금이 논의를 시작할 적기다.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장벽은 많다. 노동조합법, 국가공무원법, 군인사법 등 여러 법과 제도를 손봐야 한다. 법률의 틀은 민간 공무원과 군인을 분리하고 있고, 군인은 정치활동과 집단행동을 명시적으로 제한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 숙의 민주주의, 즉 사회 전체가 시간을 들여 함께 토론하고 조정해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라는 식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 시작점은 군대보다 먼저 경찰과 소방 같은 준군사적 조직에서 논의해 보는 게 더 합리적일 수 있다. 이들 역시 국민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직역이면서 군대만큼 폐쇄적이진 않다. 여기서 쌓인 논의와 제도적 경험이 장차 군대로 확장될 수 있다.
군인의 봉사는 ‘서비스’로 불리는 ‘공짜 군만두’가 아니다. ‘의무’ ‘충성심’이란 단어로 그들의 노고를 그저 당연한 일로 평가해선 안 된다.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드는 구조는 결국 군 자체를 쇠약하게 한다. 군인이 직접 나서기 어려운 지금, 국민이 대신 나서야 한다. 정치권이 외면한다면 시민사회가, 언론이, 유권자가 물어야 한다. “군인의 노동은 누가 대변하느냐?”
지금 군대에 노조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군인에게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터무니없이 들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그 시작이, 국민이 군인의 노조가 돼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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