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친구는 총칼의 공포 막아준 유일한 방패였다

입력 2023. 12. 06   16:25
업데이트 2023. 12. 0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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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치유한 상처 - 메리 앤 섀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차 대전 중 독일에 점령된 작은 섬 배경

감시 피하려 만든 ‘독서모임’ 점차 발전
작품·작가 토론하며 고통의 현실 잊어
북클럽 회원과 소통하던 작가 직접 방문
평화로운 풍경 이면의 아픈 사연 발견
인간에게 위안 주는 ‘연결’의 의미 성찰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스틸컷.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스틸컷.


“모두가 굶주렸었지만, 진정 무엇에 굶주렸는지 아는 건 엘리자베스였죠. 바로 사람들과의 소통. 유대감이었답니다.”

코로나19를 통과하던 시절 거리 두기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고통을 받은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상의 단절이었다. 겨우 그 터널을 통과한 현재에도 코로나19 시기의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표지.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표지.


메리 앤 섀퍼의 책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다시 펼친 이유다. 이 소설은 전쟁 기간에도 책을 읽으면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몸부림과 인간에게 진정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한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줄리엣은 영국의 인기 작가다. 종전 직후인 1946년,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다가 영국령 건지섬의 문학회 모임 회원 ‘도시’에게 책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는다. 줄리엣은 건지섬의 문학회 회원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건지섬에 있는 독특한 문학회 모임을 알게 된다. 

1940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 채널 제도에 위치한 건지섬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일하게 독일에게 점령된 영국 영토였다. 독일군은 건지섬을 점령한 후 영국 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했다. 섬 주민들의 삶은 궁지로 내몰린다. 독일군은 가축들을 모두 몰수했고, 주민들은 감자를 재배하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간다. 섬에는 전기마저 끊겼고 사람들은 고립된 채 살아갔다.


소설의 배경인 건지섬 위치. 사진=게티이미지
소설의 배경인 건지섬 위치. 사진=게티이미지



어느 날, 감자수프로 굶주린 배를 채우던 섬사람들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된다. 섬 주민 아멜리아는 독일군 몰래 돼지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이웃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들을 모은다. 엘리자베스의 집에 모인 주민들은 돼지를 잡아 비밀스러운 만찬을 즐긴다.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주민들은 간만에 활기찬 대화를 나눈다. 주민들은 돼지고기 요리와 수다를 즐기면서 전쟁의 불안을 잠시나마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찬을 즐기고 귀가하던 중 엘리자베스는 통금시간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독일군에게 심문받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독서 모임’을 하다가 늦었다고 독일군에게 둘러댄다. 독서 모임의 명칭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였다. 엘리자베스는 심문받으면서 우체국장 에번 램지가 만든 감자껍질파이 떠올렸던 것이다. 얼떨결에 생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실제 모임이 된다. 독일군의 감시를 피하려고 만든 독서 모임은 실제 모임으로 발전하게 된다.

매주 금요일 건지섬 주민들은 작가들의 작품을 낭독하고 토론하려고 모인다. 주민들은 장작을 태우면서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말하고 책을 돌려 읽는다.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샬럿 브런테 등의 책을 읽고 토론을 나누는 모임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된다. 문학회 모임은 전쟁 기간 내내 건지섬 주민들의 교류 장이 된다. 북클럽은 주민들에게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전쟁이 계속되던 시기에 주민들은 책과 작가에 대해 토론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어느덧 책은 이들에게 유일한 구원이 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포스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포스터.

 

독서는 비참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가 됐다. 주민들은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전쟁을 잊었고, 북클럽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계속 늘어났다. 독일군은 책을 읽는 섬 주민들을 통제할 명분을 잃었다. “우리는 책과 친구들에게 매달렸어요. 책과 친구는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으니까요.” 먹는 데만 관심이 있던 철물점 주인 윌은 토머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신앙을 바로 세우게 되고, 알코올 중독자였던 존은 『세네카 서간집』을 읽고 나서 술을 끊는다. 혼자 단절된 생활을 하던 도시는 이웃과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게 되고, 엉뚱한 ‘약장수’ 이솔라는 『폭풍의 언덕』을 사랑하게 된다. 

주고받는 편지가 계속 쌓이면서 줄리엣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회원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건지섬에 온 줄리엣은 글로만 마주했던 북클럽 회원들을 만난다. 줄리엣은 북클럽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작가로서 서서히 성장한다. 줄리엣이 북클럽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하자, 북클럽 멤버들은 줄리엣의 집필을 거부한다.

줄리엣은 그 이유를 파헤치면서 독일 점령기 건지섬의 아픔을 발견한다. 모임을 주도한 엘리자베스는 독일군 군의관과 사랑에 빠져 딸 킷을 낳았다. 그들의 관계는 금방 발각됐고, 엘리자베스는 유대인 아이를 숨겨주고 치료해줬다는 죄목으로 나치 비밀경찰에게 잡혀간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은 끊긴다.

엘리자베스의 행방을 추적하던 줄리엣은 엘리자베스가 수용소에서 폭행당하던 한 소녀를 구하려다가 총살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수용소에 끌려가서도 불합리한 처우에 항의하면서 저항을 이어가다가 결국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한다. 엘리자베스의 딸 킷은 북클럽 회원들의 손에 자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의 과거를 캐고 다니는 줄리엣의 활동은 북클럽 멤버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줄리엣은 평화로운 건지섬의 풍경 뒤에 감춰진 전쟁의 슬픔과 비극을 하나씩 알아간다. 그리고 섬 주민들이 건재할 수 있었던 독서와 대화의 의미를 깨닫는다.

작가 메리 앤 섀도는 실제 건지섬의 북클럽 회원이었다. 자전적인 경험과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 소설은 2009년 발표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소설은 독서와 대화로 전쟁의 공포를 이겨낸 사람들의 기록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과 ‘위안’의 의미를 묻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인간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줄리엣은 건지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기묘한 위안을 얻는다. 상처받은 자에게 유일한 위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의 존재다. 우리는 생존 경쟁에 몰두하면서 이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 책을 읽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건지섬 주민들은 전쟁의 공포를 잊을 수 있었다.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우리가 갈망했던 것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발 급성 폐렴 급증 소식과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소식을 접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는다. 피해자의 고통을 들어주지 않을 때 비극은 더욱 깊어진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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