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군대이야기’ 북한 도발 시리즈 ③끝 연평도 포격전

입력 2023. 11. 21   17:28
업데이트 2023. 11.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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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포! 사격 준비 끝!
기억해야 할 필사의 흔적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정전협정 깬 북한군, 부대·민가 무차별 포격
화염에 눈 안 보이고 폭염에 귀 안 들려도
실전 교육훈련 반복 숙달한 연평부대
포 정비해 13분 만에 대응사격…북한군 도발 멈춰
평범한 청년이었던 용맹한 해병들 임무 완수

연평도 포격전 당시 임준영 상병이 불에 탄 방탄모를 쓴 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연평도 포격전 당시 임준영 상병이 불에 탄 방탄모를 쓴 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해야 하는 장병들에게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는 강한 정신전력입니다. 강한 정신전력은 적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에 국방홍보원은 국방부 정신전력문화정책과와 함께 최근 북한의 도발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국방TV를 통해 ‘그날군대이야기 특별편 북한 도발 시리즈’를 선보이는 것입니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제2연평해전에 이은 마지막 주제는 정전협정 이후 북한군이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포격한 최초의 사건인 ‘연평도 포격전’입니다.  안승회 기자



북한군의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연평도 포격전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경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북한군은 부대는 물론 민가에까지 무차별적으로 170여 발의 포탄을 마구 발사했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그런 와중에도 해병대 연평부대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적과 맞서 싸웠다. 단 한 명도 숨거나 피하는 장병은 없었다. 결국 치명타를 입은 북한군이 포격을 멈췄고 우리도 대응사격을 중지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위대한 승전, 연평도 포격전이다.

22일 오전 10시 국방TV를 통해 방영되는 그날군대이야기 ‘북한 도발 시리즈’ 연평도 포격전 편에선 육군6사단 옹성우 일병과 이혜성 아나운서가 화자로 출연한다. 두 사람은 청자로 등장한 배우 심달기와 가수 황보에게 북한군 기습 도발에 맞서 우리 해병대가 승리한 전투인 연평도 포격전에 대해 설명한다.

 

땅에 박힌 방사포 추진체가 연평도 포격전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국방일보 DB
땅에 박힌 방사포 추진체가 연평도 포격전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국방일보 DB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용맹한 해병들

이야기는 연평도 포격전 당시 일병이었던 이한의 과거부터 전개된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를 꿈꿨다. 경기도 평택 자택에서 연기학원이 있는 서울 강남까지 지하철로 왕복 4시간을 다니며 연기를 배웠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 대학 입시에서 원하던 예술대학교에 불합격했다. 재수를 고민했지만 먼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해병대에 지원했다.

그해 3월 26일 온 국민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천안함이 북한군 중어뢰에 맞아 피격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104명의 승조원 중 46명이 전사했다. 당장 전쟁이 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한은 불안한 안보 상황에서 해병대에 입대하는 게 두려웠지만, “이럴 때 나라를 지켜야 진정한 영웅”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얻어 그해 5월 1118기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용맹한 해병들은 이한처럼 꿈 많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합동 영결식에서 고 서정우 하사와 고 문광욱 일병의 영정이 운구되고 있다. 국방일보 DB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합동 영결식에서 고 서정우 하사와 고 문광욱 일병의 영정이 운구되고 있다. 국방일보 DB



북한군, 민가에까지 무차별 기습 포격

2010년 11월 23일 해병대 연평부대. 이한 일병을 비롯한 장병들은 여느 날처럼 훈련에 한창이었다. 이날 오후 대피 훈련을 마치고 방공호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던 이 일병 눈앞이 번쩍였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확 꺾이더니 그대로 날아가 고꾸라졌다. 정신을 차린 이 일병 눈에는 왼쪽 다리를 잃은 해병,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해병의 모습이 보였다. 건물 곳곳이 불에 탔고 뿌연 연기로 뒤덮인 하늘에선 포탄 파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한 것이다. 당시 이 일병은 허벅지 관통상을 비롯해 얼굴과 몸 4곳에 포탄 파편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이날 오후 2시34분 북한군은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겨냥해 포격을 감행했다. 해안포 등을 동원해 부대뿐 아니라 민가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포탄 170여 발을 발사한 것.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 포7중대는 전술훈련평가(ATT) 사격이 한창이었다. 평가에서 K9 자주포 1문(넷 포)의 격발 불량으로 응급처치하던 중 적의 도발이 시작됐다. 여기에 하나 포(1포)·둘 포(2포)·삼 포(3포) 자주포 총 3문이 북한군 포격에 맞았다. 포7중대가 보유한 6문의 자주포 중 2문밖에 운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탄약고에 불이 나고 통신망이 끊어졌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 포7중대 자주포 옆으로 포탄이 떨어져 불기둥이 솟구치고 있다. 국방일보 DB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 포7중대 자주포 옆으로 포탄이 떨어져 불기둥이 솟구치고 있다. 국방일보 DB



단 13분 만에 대응사격… 대한민국 해병대의 승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7중대 장병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화재 진압, 통신망 복구, 피해 상황 확인.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대응 사격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3분. 긴급하게 정비를 마친 둘 포까지 가담하면서 포7중대는 자주포 3문으로 50여 발의 대응사격을 했다.

“둘 포는 화염에 휩싸인 자주포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을 찾았을 때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 포에서 무전을 통해 ‘둘 포! 사격 준비 끝!’이라는 결의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그래 한번 해보자’라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당시 포7중대장이었던 김정수 중령의 회상이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지만, 북한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포7중대는 주둔지 전기가 다 끊어진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전기를 복구한 뒤 2차 대응사격을 했다. 피해를 당한 포반까지 가담해 총 4문으로 30여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장병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평소 훈련한 대로 침착하고 신속하게 대응했다. 1시간 30여 분가량 이어진 포격 끝에 북한군이 먼저 사격을 멈추면서 대한민국 해병대의 승리로 연평도 포격전은 마무리됐다.

연평도 포격전 이후 북한은 노동신문에 ‘원수의 포탄에 우리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라는 기사를 썼다. 북한군의 피해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북한군은 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격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연평도를 사수하며 승리했지만, 아군의 전사자도 발생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해병, 고 서정우 하사와 고 문광욱 일병이다. 당시 병장이었던 고 서 하사는 전역 전 휴가를 가기 위해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 쪽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휴가를 포기한 채 복귀하던 중 북한군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고 문 일병은 당시 입대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은 이병이었다. 전투 중 포탄 파편을 맞고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전사했다. 이 밖에도 북한군과 맞섰던 연평부대 장병 중 16명이 부상했다.


연평도 사수 일념으로 임무 완수한 해병들

연평도 포격전에서 대한민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김 중령은 “실전적인 교육훈련을 수없이 반복 숙달한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포7중대는 2010년 1월부터 포격전이 벌어진 11월 23일까지 전투배치 훈련을 총 455회 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훈련한 덕분에 화염과 폭음으로 귀가 들리지 않고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장병들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는 게 김 중령의 설명이다.

또 다른 이유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임무를 다한 해병들의 강인한 정신력에서 찾을 수 있다. 눈앞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진지 안으로 자주포를 옮긴 해병, 죽음을 무릅쓰고 탄약을 재보급한 해병, 방탄모에 불이 붙은 것도 모른 채 대응사격을 한 해병까지. 이들은 끝까지 연평도를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각자 임무를 완수했다. 당시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된 이한 일병은 5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 5개월이나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이 일병은 퇴원하자마자 연평부대로 복귀를 희망했다.

“하루빨리 부대로 복귀해 북한군과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군인으로서 당연히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렵기도 했지만, 전우들과 함께라면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습니다.”   


김정수(중령) 해병대2사단 포1대대장 “적 반드시 도발…그때를 대비해야” 


“저 역시 연평도 포격전 당시에 ‘설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적의 도발로 전투를 치른 이후 제 생각은 확고하게 변했습니다. 적은 반드시 도발합니다.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 군인의 사명입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 포7중대장으로 북한군과 맞섰던 김정수 중령은 “우리 장병들이 내 부대가 불타고 내 옆의 전우가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길 바란다”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군은 또 도발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주포가 시커먼 연기에 휩싸이고 그 사이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걸 봤습니다. 가장 먼저 ‘제발 살아만 있어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대응사격을 할 수 있으니까요. 긴급정비를 마친 포반에서 ‘사격 준비 끝’ 보고를 했을 땐 죽었던 전우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대원들도 용기를 얻고 각자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김 중령은 13년 전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김 중령은 연평도 포격전의 승전의 원동력으로 반복된 훈련과 목숨 걸고 임무를 완수한 해병대 대원들의 정신력을 꼽았다.

“당시 임준영 상병은 자신의 방탄모가 불타는 와중에도 옆의 전우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데 열중했습니다. 삼 포 같은 경우에는 적의 공격으로 구동 제어기 케이블이 단락됐는데,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포반장이 신속하게 반자동 사격 임무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 포반은 자주포 바로 인근 4미터 지점에 포탄이 떨어져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손짓, 발짓으로 대응사격을 준비했습니다. 포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포반장이 살아야 대응사격을 할 수 있다’며 포반장을 안전한 자주포 내부로 거의 집어던지다시피해서 대피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용맹하게 적과 맞섰습니다.”



육군6사단 옹성우 일병 “연평부대 장병이 승리의 주역” 


해병대 연평부대 모든 장병이 승리의 주역이자 대한민국의 영웅입니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적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언제, 어디서든 도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국군이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국군 장병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굴의 전투 의지와 용기, 투철한 사명감으로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장병들의 노고와 헌신을 더 많은 국민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배우 심달기 “매일 훈련하는 군인들 대단”


연평도 포격전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한의 도발로 전투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를 지켜줄 분들은 대한민국 군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군 포격으로 긴박한 상황에서도 우리 해병대가 13분 만에 대응사격을 했다는 대목에서 군인분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하시는지 엿볼 수 있었어요. 평소에도 매일 훈련하면서 대비하고 있는 모든 군인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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