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 이야기 - 핵무기 시대 출발과 여정 (중)
핵분열 시 결손된 질량 에너지로 변환
유럽·미국 과학계로 소식 바로 전파
루스벨트, 우라늄위원회 설치 승인
일 진주만 공습에 미 맨해튼 프로젝트
1945년 7월 16일 첫 핵실험 성공
8월 6·9일 일에 2차례 핵폭탄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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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에서 개봉한 두 영화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성격이 판이한 두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동시에 선보였는데, 두 영화의 이름을 합성한 ‘바벤하이머’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깊이와 수준에서는 원자폭탄의 개발을 이끌었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영화가 더 주목받고 있다. 제작사가 영화의 개봉시기까지 세심하게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 개봉시기인 7월과 우리나라 개봉시기인 8월 역시 원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던 때다.
먼저, 개발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던 최초의 플루토늄탄 핵실험(트리니티 계획)이 미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1945년 7월 16일 이뤄졌다. 미국이 인류 최초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우라늄과 플루토늄 핵폭탄을 투하한 날은 트리니티 시험 3주 뒤인 8월 6일과 9일이었다.
19세기 말부터 과학자들은 원자 단위 이하의 미시세계를 하나씩 파헤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기반으로 질량과 에너지의 변환이론을 발표하면서 핵무기 탄생의 주요한 이론적 토대가 마련됐다.
그러나 보통 아인슈타인 같은 소수의 천재 과학자가 기초과학 이론을 밝혔다고 하더라도 바로 무기 개발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이후 수많은 추가적인 과학기술 연구개발 활동이 필요하다. 또 제조공정에서의 시행착오와 실패, 다수의 현장 인력이 동원돼야 하는 긴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단기간에 세상에 선보이기는 했지만, 원자폭탄 역시 이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어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 대부분 유대계였던 독일 과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 리제 마이트너, 오토 프리슈가 양성자를 가속시켜 우라늄 원자핵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했다. 이를 통해 우라늄보다 원자량이 작은 바륨과 크립톤핵으로 쪼개지는 ‘원자핵분열’ 현상을 처음 발견했다.
이 발견은 그때까지 절대 쪼개질 수 없다고 믿어졌던 물질의 기본단위 원자(정확히는 원자핵)가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질 수 있다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특정 원자핵이 분열해 다른 원소, 즉 다른 물질로 바뀔 수 있음이 증명된 인류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비록 금은 아닐지라도 금이 아닌 원소에서 금을 얻고자 했던 인류의 오랜 꿈인 연금술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인류 역사의 획기적 발견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원자핵분열 실험과정에서 발견된 또 다른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양성자를 우라늄핵에 충돌시켰을 때 충돌 전후, 즉 분열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전체 질량이 극소량 줄었음을 발견했다. 우라늄핵이 단지 바륨핵과 크립톤핵으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그 외에도 새로운 중성자 입자들이 튀어나오고 동시에 일정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점이었다.
이때 감소된 극소량의 질량값과 새로 방출되는 에너지양을 계산해 봤더니 아인슈타인의 E=mc² 공식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는 핵분열 시 결손된 질량만큼을 엄청난 에너지양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시는 이 같은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과학자들이 단순히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성취감으로 즐길 만큼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다. 특히 발견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마이트너는 히틀러의 유대인 핍박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독일을 탈출한 망명 과학자였다. 나머지 독일계 과학자 역시 편하게 과학적 의미만을 좇아 연구에만 전념하기는 어려운 불안한 시기였다. 전운이 감돌던 당시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1차적으로 무기 개발의 가능성과 연관 짓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었다.
독일 과학자들의 핵분열 발견 소식은 세계 과학자 사회의 네트워크를 타고 전 유럽과 미국 과학계까지 전달됐다. 마이트너와 같이 히틀러를 피해 망명한 수많은 유대계 과학자를 포함해 명망 높은 과학자들을 관련 연구에 집중시키게 만들었다.
1939년부터 우라늄 핵분열 시 생성되는 중성자들이 연쇄적으로 주변 핵에 충돌하게 되고, 이때 더 엄청난 에너지 방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원자핵분열 연쇄반응’ 등 관련 연구성과들이 이어졌다. 또한 희소광물인 우라늄 원소는 원자핵 질량값인 원자량이 조금 큰 U238이 대부분인데, 우라늄 중에서 0.7%밖에 없는 U235 동위원소를 분열시킬 때 훨씬 더 큰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심지어 5㎏ 정도의 U235을 추출하면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TNT) 수천 톤의 위력을 가진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는 계산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우라늄을 플루토늄핵으로 먼저 변환시켜 분열시킬 때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이어지면서 과학계를 흥분시켰다.
핵분열 등 결정적 연구성과들이 독일 과학자들에 의해 얻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히틀러가 과학자들을 이용해 먼저 이 무기를 손에 넣게 되면 결국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독일보다 먼저 영국이나 미국이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조급함이 번져 갔다.
이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원자탄 개발을 논의하는 모드(MAUD)위원회를 만들어 개발을 검토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시작된 유럽의 세계대전을 피해 부자나라 미국에서 개발이 진행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공감을 얻으면서 미국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수많은 독일 출신 망명 과학자 중 하나였던 레오 실라드는 당대 세계적 명사였던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폭탄 개발을 서둘러 줄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써서 전달하도록 동분서주했다. 이러한 시도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레이다를 비롯한 전쟁무기 개발을 총괄하고 있던 국방연구위원회(NDRC) 아래 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우라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승인했다. 하지만 관련 예산을 겨우 6000달러 정도만 배정할 정도로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여하간 폭탄 개발의 모든 상황과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미국이 국가 차원의 원폭 개발을 결심하게 되는 직접적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이제 더 이상 세계대전의 방관자로 남을 수 없다는 미국 위정자들의 각성이 곧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계획)를 출범시키는 계기로 이어졌다.
1942년 9월 공식적으로 육군 공병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맨해튼계획의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로브스 장군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있던 버클리대의 38세 젊은 물리학자 오펜하이머(1904~1967)를 자신의 과학보좌관이자 파트너 책임자로 지정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20억 달러(현재 화폐가치로 240억 달러·약 30조 원)가 투입됐고, 1945년 당시 총 고용인원이 13만 명에 달했다.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거대 사업으로서 미국 무기 획득 프로젝트의 원형이자 신기원이 된 프로젝트였다.
카리스마와 저돌적 리더십으로 무장한 그로브스 장군이 군사책임자인 OM(Operational Manager)으로 발탁되고 역시 천재 물리학자이자 영특한 과학행정가로서 기술관리의 정수를 보여 준 오펜하이머가 기술총책임자인 TM(Technology Manager)을 맡게 된 점이 채 4년이 안 되는 기간에 기대 이상의 슈퍼무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성공요인의 하나였다. 원폭 개발과 투하의 인류사적 이벤트의 요모조모를 다음 글에서 이어 소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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