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한 명의 스파이가 역사를 바꾼다
프라하의 봄 잔인한 무력 진압에 분노
공산주의 조국 파멸 앞장서기로 결심
소련 KGB 근무하며 영국 스파이 활동
신뢰도 높은 내부 정보에 분석도 탁월
철의 장막 속 소련 파헤치는 데 큰 도움
가장 위대한 이중스파이의 죽음
지난 3월 21일 세계 언론은 냉전기 소련 정보기관 KGB의 런던 지부장을 지낸 고위급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3월 4일 86세로 런던 근교 자택에서 사망했음을 알렸다. 혹시 모를 러시아 정보기관 관련 여부를 조사하느라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소련이 궐석 재판에서 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것이 1985년이니 40년을 더 산 셈이다.
그는 생전에 영국을 위한 이중스파이로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소련을 서방이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줬다. 발각돼 극적으로 소련에서 탈출하면서는 영화 같은 첩보전의 주인공이 됐고,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초청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등 역사상 보기 드문 화려한(?) 스파이의 삶을 살았다.
그는 아버지와 형이 모두 KGB에 근무하는 출신성분과 뛰어난 어학능력, 충성심 등으로 장래가 촉망됐다. 하지만 1968년 8월 체코의 민주화 개혁인 ‘프라하의 봄’을 소련이 대규모 병력과 탱크로 압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 공산주의 조국의 파멸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앞서 소련군 정보기관 GRU의 대령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내부 정보를 미국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펜코프스키가 1963년 비참하게 처형된 것처럼 배신은 목숨을 건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위대한 것은 돈을 위해 조국을 판 많은 스파이와 달리 ‘조국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11년 동안이나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수천 건의 중요 첩보를 제공했다는 양적 성과도 대단하지만, 질적으로도 자신의 첩보에 대한 최고 수준의 분석을 스스로 제공할 수 있었던 남다른 스파이였다.
정보기관은 수집과 분석 업무가 분리돼 있고, 수집된 첩보는 전문 분석관의 평가를 거쳐 비로소 가치 있는 정보가 된다. 하지만 그는 신뢰도 높은 첩보의 출처였을 뿐 아니라 소련인들조차 모르는 KGB의 내부 체계, 문화, 사고방식 및 정치 지도자들의 생각까지 읽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으로 첩보의 의미를 분석해 줌으로써 최고 수준의 정보적 가치를 인정받는 스파이였다.
마거릿 대처 총리가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소련 내 구출 작전 수행으로 영국이 어떠한 외교적 위험에 처하더라도 작전을 수행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름은 모르지만(총리는 그냥 ‘콜린스 씨’로 불렀다) 영국이 소련을 상대하는 데 그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게임
그는 모스크바 국제관계 대학교에서 독일어·덴마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 등을 익혔다. 1963년 KGB에 합류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근무하던 1974년 영국 MI6 공작관에게 포섭됐다. 이미 서방을 위한 정보활동을 결심하고 있던 터라 자발적으로 이중스파이가 됐다. 마이크로 필름이나 서류를 MI6 요원과 ‘브러시 패스’(스치듯 지나가며 전달)를 통해 전달하고, 30분 이내 복사 후 돌려받는 수법으로 정보를 빼돌렸다.
그가 넘긴 수백 건의 비밀문서에는 본부 지시전문, 외교 전략뿐 아니라 스웨덴 정보기관원, 노르웨이 외무부 여직원 등 소련의 간첩에 대한 방첩 첩보도 포함돼 있었다. 런던의 은행에 돈을 축적해 두겠다는 MI6의 약속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서 소련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78년 그가 귀국하자 MI6는 그의 안전을 고려해 공작을 중지했으나 1982년 다시 영국으로 파견된 후 안전한 환경에서 접촉하며 소련의 영국에 대한 첩보활동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존경받는 노동운동가 잭 존스, 좌파 의원 밥 에드워즈, 노동당 의원 마이클 풋이 소련에 정보를 제공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뿐 아니라 KGB에 대한 포괄적 통찰력을 얻게 됐다.
특히 1983년 11월 KGB가 서방의 선제 핵 공격을 우려해 벌인 대대적 징후수집 첩보활동인 라이언(RYAN) 작전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핵 전술을 포함한 대규모 훈련인 ‘에이블 아처’가 맞물려 역사상 두 번째 핵전쟁 위험이 고조됐을 때 소련 내 상황을 알려 위기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는 1985년 4월 KGB 영국 지부의 모든 비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런던 지부장으로 승진했지만 한 달 후 모스크바로 소환돼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치명타는 의외로 대서양 건너편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CIA 역사상 최악의 이중스파이로 알려진 올드리치 에임스가 워싱턴 소련대사관으로 찾아가 소련 내 미국 스파이 25명의 명단을 전달하면서 KGB 내부에 MI6의 이중스파이가 있다는 것도 알려준 것이다.
두더지(정보기관 내 적의 이중스파이)는 생존을 위해 적 기관 내 자기 기관이 운용하는 두더지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숙명을 갖고 있다. 적 기관 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두더지가 있다면 그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대 두더지를 제거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핵전쟁 발발을 우려해 미국 CIA에 고르디옙스키의 정보를 지원한 MI6, 알려주지 않는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 너무 열심이었던 CIA가 그의 이름을 알아낸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엄격한 감시 중에도 고르디옙스키에게는 아직 남은 카드가 있었다.
MI6가 준비해 둔 탈출 계획인 ‘핌리코 작전’이다. 신분이 드러났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는 언제든 화요일 저녁 7시30분 특정 빵집 앞에서 회색 바지와 회색 모자 차림으로 특정 슈퍼의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으면, 이를 확인한 MI6 모스크바 지부가 탈출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1985년 7월 16일 화요일 신호를 보냈고, 계획대로 금요일에 레닌그라드행 야간열차를 탔으며, 토요일에 버스로 핀란드 국경과 가까운 특정 지점에 도착했다. 이후 MI6 요원들과 접선, 차량 트렁크에 실려 국경을 넘었다. 외교관 번호판을 단 차량으로 검색을 피하고, 혹시 모를 경비견의 후각을 돌리기 위한 코담배, 열 감지장치를 피하기 위한 열 차단 담요까지 준비한 치밀한 작전이었다.
정보전에 대한 이해가 정보력을 키운다
정보활동은 일반인 생각보다 훨씬 더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만 실패하기 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늘 비난만 받을 뿐이다. 국제 정치의 냉엄함 속에서 공개 정보와 외교만으로 순진한 기대를 품고 상대의 선의만 바랄 수는 없다.
강대국은 그냥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정보력을 키워왔다. 스파이의 가치를 판단하고 장기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공작 역량은 단기간에 키워지지 않는다. MI6는 덴마크에서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고르디옙스키가 모스크바로 복귀하자 소련 내에서는 공작을 추진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제력을 발휘했다. 공작팀 이외 장관과 총리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출처를 알리지 않았다. 정보 업무의 특수성을 이해해 주지 않는 관료적 분위기라면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대처 총리도 소련에 대한 정치적 시각을 제공해 주는 정보기관의 보고를 매우 중시했다. 지금도 국가 간 정보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첩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지만, 우리는 정보전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고 방첩도 너무 느슨하다.
적국이 아닌 외국을 위한 행위로는 간첩죄가 성립되지 않는 형법, 방첩 활동을 위한 휴대전화 감청이 허용되지 않는 통신비밀보호법 등은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스파이 한 명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전 국민이 인식하고, 정보 역량을 키우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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