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 틀 확립 시기 전문직 등장
국가 경영· 군사력 강화 임무 담당
공공 영역 직업인으로 자리매김
이번 정부의 국방 분야 제1의 국정과제는 ‘AI(인공지능) 기반 과학기술 강군 육성’이다. 미국 역시 2014년 중국 등 적대세력에 대한 군사력 우위는 과학기술의 우위에서 비롯된다는 3차 상쇄전략을 천명한 이래 첨단 전략핵심기술 확보와 군사적 적용을 최상위 국가 안보전략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군사력의 핵심을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무기와 전력체계로 보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군대의 역사에서 과학 또는 과학기술이 나름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앞으로 이 지면을 빌어 과학사의 몇몇 역사적 장면들을 살펴보면서 어느 시대, 어떠한 시대적 맥락과 상황에서 과학기술이 군대와 전쟁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됐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조금 더 깊고 넓게 이해하고 현재의 군대와 군사력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집필의 힘겨움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설렘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산·학·연 연구자 국민적 지지 받으며 연구
최근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학 교수의 필즈상 수상이 국가적 경사로 보도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누리호 발사를 성공시킨 항공우주연구원과 산·학·연 연구자들이 국민적 지지와 환영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업적 경쟁은 그들의 국적에 따라 국가 간 대결과 경쟁이 되고 있으며, 대다수 과학자들이 국가 지원으로 연구하면서 국가와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 최고 전문가들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민간 영역에서도 과학기술자들의 가치와 위상이 상당하지만, 국민들은 이미 과학활동을 국가 경영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국력을 갖춘 나라라면 과학기술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국가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근대 과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유명 수학자나 과학자들이라도 그 당시부터 국가적 지원을 받거나 공공의 임무를 위해 직업적으로 과학을 연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로 유명한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대표적인 근대 과학자이다. 그는 중세시대 종교관 중심의 천동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 종지부를 찍고 지동설을 입증해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업적을 바탕으로 근대 천문학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17세기 초 과학자였던 갈릴레오는 이탈리아의 피사대학과 파두아대학의 교수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연구를 위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재정적 후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독교 중심의 주류 세계관과 결합한 우주관은 인간이 거주하는 불완전한 지구를 중심으로 신의 영역인 하늘의 천구가 신의 속성과 같이 이상적인 원운동을 하면서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지상을 9겹으로 둘러싼 천구에는 역시 신의 속성과 같이 완벽한 형태의 달과 태양, 행성과 별들이 박혀 있어서 천구가 도는 대로 천체들이 지구를 도는 천문 현상을 일으킨다는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설명을 일반인들은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본인이 직접 제작해 획기적으로 배율을 높인 망원경으로 하늘을 제대로 관측하기 시작한 1세대 과학자였다. 당시 망원경은 항해의 필수품이었고 육상과 해상 전장에서 감시정찰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개량해 쓰고 있었다. 갈릴레오 역시 천체 관측용뿐만이 아니라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의 군사용 망원경 제작을 위해서도 열심히 렌즈를 깎고 개량 작업을 진행했다.
1610년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천상의 모습은 주류 우주론의 설명과는 딴판이었다. 완벽해야 할 태양 표면의 불규칙한 흑점들과 울퉁불퉁한 달 표면, 그리고 목성 주위에 매달려 있는 4개의 위성(달) 모습을 그린 갈릴레오의 스케치는 당시의 주류 천동설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파괴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물론 갈릴레오가 단순히 망원경 관측과 혼자만의 업적으로 근대 천문학 혁명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천체 관측 결과는 중세 천문학, 우주론과의 결별을 알리는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그의 저서에 이러한 천체 관측 사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만 서술하지 못했다. 저서 첫머리에 본인이 후원받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환심과 그 이상의 지원을 받기 위해 먼저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로 이름 붙이고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코시모 2세를 향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칭송과 감탄으로 버무려진 장황한 문장들을 채워 넣었다. 이러한 갈릴레오의 행적은 아직 생업을 겸한 전문직업으로서 과학 활동이 보장되지 못하던 시기에 과학자들이 처한 연구 환경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부유한 가문 후원으로 어렵게 연구 이어가
근대 물리학을 완성한 뉴턴 역시 전문직업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과학을 연구하던 시대에 인류사적 업적을 남긴 과학자였다. 지상의 역학 현상과 하늘의 천체 현상이 만유인력과 힘의 개념이 중심이 되는 동일한 물리 법칙(뉴턴의 3법칙을 기억하라!)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갈릴레오에 이어 근대물리학과 천문학의 혁명을 완성한 뉴턴(Isaac Newton, 1642-1727)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진 않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강의하고 화폐 제조를 관할하던 조폐국장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이처럼 17세기나 18세기 초반 활동했던 갈릴레오나 뉴턴은 아직 과학연구를 업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 서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되는 초입의 과학자들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교양을 쌓거나 고상한 정신활동 또는 일생을 걸 정도의 진지한 취미활동으로서 과학을 연구하기 위해 본인의 유산을 쓰거나 부유한 가문·왕실의 후원을 어렵게 얻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던 과학 연구가 사회적·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점차 ‘전문직업인(profession)’으로 대접받는 과학자들이 등장하게 됐다. 변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무렵 프랑스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 시기는 구 왕정체제(앙시앵레짐)와 결별하고 시민혁명과 나폴레옹의 공화정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기로서, 근대국가의 틀이 확립되던 시점과도 일치한다.
많은 변화 겪으며 군대·전쟁 영역에 첫발
여기서 전문직업이란 단순히 그 일을 통해 생계가 해결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상당한 수준의 체계화된 전문교육과 지식 습득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데 필수적인 임무를 대행하면서 권력집단과 공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집단을 ‘전문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서양의 중세로부터 이어진 가장 오래된 전문직은 법관과 의사, 그리고 종교인이나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세속 권력을 유지해주는 법을 집행하고 대중의 보건을 책임지며, 정신적으로 대중을 지배해 신권을 유지해 줬는데, 이들이 담당하는 일이 바로 영주나 왕정의 권력을 지키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다.
근대의 국가시스템이 정비되면서 이들 외에도 국가 경영과 통치에 필수적인 전문업무 영역이 점차 넓어져 갔다. 먼저 정부의 전문 관료제가 발달했다. 동시에 국가의 필수 요건인 근대적인 군대 시스템 속에서 군 장교들이 전문직업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권력자들은 과학자들의 자질과 능력이 국가 경영과 군대를 체계화하고 군사력 강화에 상당히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인식은 과학자들이 전문직업인으로 탈바꿈하는 데 직·간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제 개인적 열정과 취미로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사색과 연구에 일생을 바치던 자연철학자가 국가 경영에 필요한 임무를 담당하는 공공 영역의 전문직업인인 ‘과학자’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게 됐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군대와 전쟁의 영역에 근대의 과학자들이 첫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제 그 자세한 이야기를 다음 회부터 이어나가겠다.
필자 박영욱 (사)한국국방기술학회 이사장은 서양과학기술사를 전공한 뒤 20여 년간 국방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글로벌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