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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서예를 시작한 지 1년 정도가 됐다. 서예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실력이지만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종이 위에 올려놓으면 검은 먹물이 천천히 스며드는 그 느낌이 좋아서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있다.
아직은 그날그날의 좌우명을 어설픈 서체로 적어 SNS에 올려놓고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수준인데 뜻밖의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그래픽디자이너였다. 지방자치단체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하는데 거기에 적당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글씨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SNS를 보고 몇몇 서체가 마음에 들어서 정식으로 의뢰하려 한다고 말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글씨 쓰기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인데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면서도 ‘내 글이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나?’라는 생각까지…. 그래도 뭐든지 의뢰를 받는 것은 즐거워하는 성격이라 기쁘게 받아들였다. ‘혁신’. 이 두 글자만 다양한 서체로 써주면 된다고 했다. 글씨 정도 써주는 것이니까 뭐…. 하지만 이렇게 만만하게 생각한 게 실수였다.
종이 앞에 서서 혁신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느낌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변화하는 느낌, 진취적인 느낌, 창의적인 느낌. 나에게 느껴지는 혁신은 둥글둥글하기보다는 모서리가 살아있는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반영하기 위해 이런저런 글씨를 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수백 개의 ‘혁신’을 쓰고 또 썼다. 책상 한편에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처음에는 잘 쓰는 것에만 집중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가니 혁신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게 됐고, 시간이 더 지나가니 ‘혁신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일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혁신(革新).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 하지만 IT가 발달하고 스마트함이 기준이 되고 거기에 속도와 트렌드가 더해지면서 혁신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뒤집고, 완전히 새로운 판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정해진 느낌이다. 정말 혁신은 그런 것일까?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기자 선배가 최근에 작은 책방을 열었다. 그 책방을 만들기 위해 제주의 낡은 구옥(거의 폐가)을 구입해 대대적으로 개·보수(거의 신축)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에 집을 쓰던 할아버지가 집안 곳곳에 잡동사니들을 엄청나게 쌓아 놓아 그것을 처리하는 데 꽤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했다.
심지어 4차선 양옆에 서 있을 법한 가로등부터 골동품처럼 보이는 초대형 나무수레까지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언젠가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쌓아 놓았을 것 같다고 하면서, 그 ‘언젠가는 쓸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우리를 자꾸 뭔가를 쌓아 놓고 결국 그 무게에 깔려버리는 인생으로 만드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됐다고 했다.
선배의 작은 책방으로 인해 동네의 애물단지였던 낡은 폐가는 동네의 사랑방이자 지역의 명소가 됐다. 완전히 다른 것이 된 것이다.
혁신의 원래 뜻은 ‘동물의 가죽(皮)을 무두질해 완전히 새로운 용도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것에 생명력을 주어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굳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진취적이지 않아도, 창의적이지 않아도 혁신은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 내 안에 쌓아놓은 불필요한 것, ‘언젠가 쓸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만 덜어내도 재창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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