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미국 남북전쟁 소재 오페라 ‘애퍼매톡스’
노예제 폐지 놓고 첨예한 갈등 속
1861년 링컨 대통령 취임 맞춰
북부연방과 남부연맹 간 전쟁 촉발
1865년 남군의 항복으로 노예 해방
전쟁터 이름 딴 오페라 ‘애퍼매톡스’
섬터 요새 사수 위한 전투곡 등
군인들 사랑받는 노래 쏟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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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독립전쟁이 일어난 지 약 80년 만에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남북전쟁은 노예제도를 폐기하자는 미합중국(북부연방)과 유지해야 한다는 미연합국(남부연맹) 간 내전이었다. 미국에서는 ‘American Civil War’ 또는 ‘Civil War’라고 한다. 1860년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링컨(1809~1865)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남부에서 노예제를 운용하는 7개 주가 미합중국에서 탈퇴해 아메리카 연합국을 구성하고 그들만의 새로운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를 선출함으로써 촉발됐다.
독립전쟁 후 80여 년 만에 남북전쟁 발발
미국의 북부와 중서부는 농업은 물론 상업과 공업 등이 고루 발달하면서 출산율과 해외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증가하고 산업혁명에 따른 양산체제가 점차 도입됨에 따라 노예제 운용의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선언 영향으로 인간의 자유와 생명, 행복 추구 등 계몽주의 사상이 전해지면서 노예제도의 부적절성이 부각됐다. 1780년대부터 일부 노예제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1850년에는 북부 대부분 주에서 폐지했다.
반면에 남부는 기본적으로 농업 위주의 사회이고 목화 재배 같은 플랜트 농장 경영이 주를 이뤄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노예제를 반드시 운용해야만 농장 운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남북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노예제도 외적으로도 확장돼 갔다. 즉, 남부에서는 정치적으로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에 연방정부의 통제권이 넘어가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링컨 대통령의 당선은 이러한 우려를 현실화했다. 북부나 연방정부 입장에서는 남부의 노예제가 새롭게 생성되는 주나 폐지에 유보적 입장인 주로 확산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링컨 대통령 취임, 남북전쟁의 도화선 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1860년 12월 가장 먼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뒤를 이어 나머지 6개 주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취임 전까지 탈퇴해 ‘아메리카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설립했다. 이는 분리독립과 같은 의미로 재산권의 통제와 지역 내 연방정부의 요새 등을 확보하고 7개 주만의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개념이었다. 북부연방과 남부연맹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객관적 전력은 남부연합이 열세였다. 북부에는 약 34개 주가 있고, 인구도 많았으나 남부연합에는 7개 주 외에 일부 노예제를 운용하는 주들이 가세했을 뿐이다.
1861년 3월 4일 링컨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남부를 공격할 의도도 없고 노예제도를 당장 끝낼 의도도 없지만, 연방정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힘쓰겠다”고 밝혔다. 남부연합에서는 협상을 통해 연방정부 재산을 보상해주려 했으나 연방정부는 대응하지 않았다. 탈퇴한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는 연방정부에 속한 섬터 요새가 있었고, 다른 지역에는 피켄스 요새와 테일러 요새가 있었는데, 링컨은 특히 섬터 요새를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남부연맹군의 선제공격
첫 포격은 1861년 4월 12일 남부연맹군이 섬터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면서 이뤄졌다. 북부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거부하자 포격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섬터 요새는 60여 문의 대포 외에 이렇다 할 방어 준비가 없어 하루 만에 함락됐다. 링컨은 병력 소집을 요청해 상비군들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는 작전을 단행했다. 항구 봉쇄는 해상보급을 차단하려는 조치로 유효했다.
전쟁 초기에는 남부연맹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1807~1870) 장군의 승전이 계속됐지만, 해상보급이 차단당하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병력과 물자 부족 등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초기 전투에서는 남부연맹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1862년 9월 앤티텀전투에서 저지당하면서 버지니아로 후퇴하고 말았다. 1862년 12월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와 1863년 5월 챈슬러스빌 전투에서도 남부연맹군의 승리는 계속됐다. 그러나 7월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서부전선, 즉 미시시피강 유역에서의 전투는 남부연맹군이 패배를 계속하면서 강 전체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전쟁에 자신감을 갖은 링컨은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다. 공식 명칭은 ‘포고문 95호(Proclamation 95)’다.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과 전쟁의 종결
1864년에 그랜트(1822~1885) 장군은 북부연방군 총사령관, 셔먼(1820~1891) 장군은 서부지역 사령관이었다. 당시 그랜트가 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셔먼이 남부를 휩쓰는 전략을 펼쳤는데, 공세를 통해 남부군의 보급선을 파괴하고 군대를 소모시키는 것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북군의 총공세가 시작되면서 남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았다. 특히, 남군은 피터스버그전투에서 참호전까지 수행하며 약 9개월간 발이 묶인 채 큰 손실을 봤다. 1864년 동부에서 그랜트 장군의 지휘 아래 시더크릭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뒀다. 서부에서는 셔먼이 애틀랜타를 확보하고 ‘바다로의 행진(March to the Sea)’을 강행하면서 그해 12월 대서양과 인접한 사바나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농장을 초토화했으며 노예를 해방했다. 4월 1일 파이브 포크스 전투에서 리의 군대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했고, 1865년 4월 9일 마침내 항복했다.
미군에게 사랑받는 노래 많이 만들어져
당시에는 군인들에게 사랑받는 노래가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루트(1820~1895)는 섬터 전투 직후 ‘The First Gun is Fired’를 작곡했고, 30여 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 ‘Tramp! Tramp! Tramp!’ ‘The Battle Cry of Freedom’ 같은 곡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필립 글래스(Philip Glass·1937~ )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애퍼매톡스(Appomattox)’라는 2막의 곡으로 2007년 초연됐다. 애퍼매톡스는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북부연방군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 버지니아주의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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