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신념과 타락한 신념… 광기와 광기의 대결

입력 2024. 07. 01   16:39
업데이트 2024. 07. 0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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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 돌풍

인간의 신념, 어떻게 오염되고 변질되는가 

몰아치는 속도감… 
보는 내내 긴장감…
정치 도파민이 폭발한다

 

‘돌풍’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돌풍’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TV를 켜놓고 휴대전화를 보거나 딴짓을 겸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온전히 집중하지 않은 채, 딱 그 정도의 상황에서 흡사 BGM처럼 존재할 수 있도록 적당히 느슨한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월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12부작 시리즈 ‘돌풍’은 확실히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색다르다.

제목처럼 사건과 전개가 휘몰아친다. 쉴 틈조차 없어서 하려던 딴짓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쇼츠에 중독된 세대에게 오히려 이러한 속도감은 익숙하다. 호흡을 가다듬지 않고 곧바로 다음,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장면으로 빠르게 흐른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12부작이 전 편 동시 공개되면 적당한 회차로 끊어보거나 마디 점프를 거듭해 종착지로 가는 선택지를 취할 때가 있는데, 적어도 ‘돌풍’은 그럴 필요나 여유도 없이 시청자를 정주행 길로 이끈다. 아니, 사실 거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형국이다. 지독할 만큼의 몰입을 유발하고, 보는 내내 도파민을 샘솟게 만드는 작품.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 ‘돌풍’을 전면에서 이끄는 이들은 설경구와 김희애다. 두 배우는 각각 국무총리 ‘박동호’와 경제부총리 ‘정수진’으로 분해 시종일관 격정적으로 맞붙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위해 대통령까지 시해한 인물, 부패한 정치권력을 청산하기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박동호(설경구)는 우리가 흔히 알던 ‘정의로운 주인공’과 상당한 거리와 괴리가 있다.

그를 막아서는 정수진(김희애) 역시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더 큰 권력을 좇는 인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바를 이뤄내고야 마는 집요함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녀의 과거와 아득히 멀어진 지 오래. 남은 것은 오염되고 뒤틀린 신념에 들러붙은 끔찍한 악마성이다. 언뜻 신념과 신념의 대결처럼도 보이지만, 결국에는 광기와 광기의 싸움으로 귀결된다.

 

 

‘돌풍’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돌풍’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돌풍’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돌풍’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설경구와 김희애가 안심하고 폭주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 이는 이른바 ‘권력 3부작’이라 불리는 작품 ‘추적자 THE CHASER’ ‘황금의 제국’ ‘펀치’를 집필한 박경수 작가다.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과 그걸 담아내는 필력, 들으면 자꾸 되뇌게 만드는 특유의 비유적 대사들은 ‘돌풍’을 자극으로만 점철된 뻔한 작품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다. 불합리한 세상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인물의 본성과 내재된 욕망을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건들과 결합시켜 쫄깃한 얼개로 완성한다. “이번 화가 마지막 화라고 생각하고 대본을 쓴다. 다음 화를 염두하고 쓰면, 주인공이 빠져나올 만한 상황에서 멈추게 된다”는 박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비로소 ‘돌풍’의 속도감의 이유가 와 닿는다. 

그러한 대본을 화면으로 담아낸 이는 오컬트 스릴러 ‘방법’과 ‘방법: 재차의’를 연출했던 김용완 감독이다. 김 감독은 ‘돌풍’의 촬영 콘셉트를 ‘클래식’으로 잡고, 정적으로 픽스된 앵글과 날것의 핸드헬드를 뒤섞어 각 인물 간 심리를 표현했다.

프레임에 가득 채운 두 인물의 투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인물의 유대와 대립 상황을 화면에 담아내기도 했다. 연출적인 욕심이나 기교를 과도하게 부리지 않고, 오히려 더 담백하게 담아낸 모양새는 ‘돌풍’의 전달력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다.

이번 ‘돌풍’은 특정 인물이나 역사를 고스란히 차용하지 않은 ‘대체역사물’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정치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쪽도 옹호하지 않고, 가상의 상황과 존재들을 활용해 사람들의 공감과 바람을 구현할 뿐이다. 박동호와 정수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무수한 정·재계 인간군상을 나열하면서 인간이 과연 어떤 과정으로 변질돼 가는지, 뒤틀린 신념은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내고 내비치는 데 러닝타임을 과감하게 할애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정치라는 소재를 작품에서 떼놓아도 유지된다. 실제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사건이 ‘돌풍’의 면면과 포개지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작품과는 별개로 설경구와 김희애가 각각 과거에 출연한 영화 ‘킹메이커’(2022)와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2023)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의외로 재미난 지점이다. 두 작품 모두 정치를 소재로 한 작품이고, 작품명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어 두 배우가 이번에 한 작품으로 만나 맞대고 충돌하는 것이 마치 세계관의 확장처럼 느껴지는 착시까지 어린다.

신기한 것은 여태껏 수많은 작품을 찍은 두 사람이 의외로 한 작품에서 만난 일이 없었는데, 지난해 개봉한 영화 ‘더 문’과 올해 개봉 예정인 ‘보통의 가족’, 그리고 이번작 ‘돌풍’까지 비슷한 시기에 세 개의 작품에 연달아 긴밀한 호흡을 맞추게 된 것도 꽤 이례적이라서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품을 연달아 감상하는 재미가 있고, 각각의 서사에서 두 사람의 관계 변화나 캐릭터 연기를 감상하는 것은 별미다.

누구 하나를 대놓고 응원할 수도, 그렇다고 딱히 미워할 수도 없는 게 ‘돌풍’을 보는 내내 시청자에게 스미는 마음이다. 정의로운 주인공이 실종된 해당 작품에서, 악(惡)에 내밀하게 다가선 이들이 각자의 신념을 내건 채로 맞붙는 모양새와 그런 그들에게 휘둘리는 여론과 대중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충분히 곤혹스럽다. 어쩌면 그것은 작품 속에 놓인 누군가가 ‘나’ 혹은 ‘우리’로 언제든 치환 가능하다는 일말의 두려움 같은 것에서 기인한 감정은 아닐까.


필자 박현민은 신문사·방송사·잡지사를 다니며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평가위원 및 자문위원이며, 『K-콘텐츠로 보는 현대사회』 등 4권의 책을 썼다.
필자 박현민은 신문사·방송사·잡지사를 다니며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평가위원 및 자문위원이며, 『K-콘텐츠로 보는 현대사회』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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