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을 말하다] ⑨ 미군과 생사고락 ‘최초의 카투사’ 류영봉 옹

입력 2023. 05. 12   17:36
업데이트 2023. 08. 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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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군번 ‘K’, 혈맹의 우정은 남달랐다
인천상륙작전부터 장진호·백마고지전투까지…

연중기획-한미동맹을 말하다  
⑨ 미군과 생사고락 ‘최초의 카투사’ 류영봉 옹


펜으로 쓴 전사 빼곡한 지도
1950년 6·25 참전, 미군과 주요 전투 전개
미 7사단 의무부대 배속…구호법 등 훈련받아
대구~일본~인천~서울~대구~압록강~부산
정전협정 당일 새벽까지 끊임없이 사투

전역 후에도 이어진 미군과의 인연 
한미동맹 강화 일조…미 정부 훈장만 여러 개
46년간 대구 미군부대서 일하고 꾸준히 봉사도

지난 8일 대구 자택에서 참전용사 류영봉 옹이 국방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도 그림은 전쟁이 끝난 뒤 류옹이 기억을 더듬어 본인이 이동하고 참전했던 전투를 정리한 것.
지난 8일 대구 자택에서 참전용사 류영봉 옹이 국방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도 그림은 전쟁이 끝난 뒤 류옹이 기억을 더듬어 본인이 이동하고 참전했던 전투를 정리한 것.


‘K1101755’. 6·25참전국가유공자회 대구시남구지회 부회장 류영봉(91) 옹의 특별한 군번이다. 그는 열여덟 살이던 1950년 대구에서 징집돼 일본에서 3주가량 훈련을 받고, 미 육군 7보병사단 17연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미군은 류옹에게 ‘K군번’과 함께 ‘카투사(KATUSA)’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는 전역 후에도 미군부대에서 46년을 일했으며, 18년째 미국적십자사(American Red Cross) 회원으로 6000시간의 봉사활동을 했다. 한평생을 미군과 동고동락하며 혈맹의 우정을 나눈 것. 류옹은 “한미동맹의 중요도는 6·25전쟁 때가 ‘피크(Peak)’가 아니다. 갈수록 그 필요성은 늘어날 것이기에 동맹은 더욱 튼튼해져야 한다”며 강고한 한미동맹을 주장했다. 글=김해령/사진=김병문 기자


카투사 1기, ‘K군번’을 받다

류옹은 ‘최초의 카투사’다. 카투사는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의 머리글자를 딴, 미군에 배속된 한국인 군인들이다. 카투사가 탄생한 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고전을 거듭하던 미군은 국내 지형을 잘 알면서 언어장벽을 해결해 줄 대한민국 청년들을 카투사라는 이름으로 충원했다. 카투사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주요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데 능했고, 민간인·포로를 상대로 많은 정보를 얻어 내 미군이 전략을 짜는 데 도움을 줬다.

류옹도 6·25전쟁 주요 전투에서 미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그가 들려준 6·25전쟁 참전기는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전쟁의 기억을 기록한 종이를 손으로 짚어 가며 설명했다. A4용지에는 한반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는 류옹의 움직임을 표시한 화살표가 빼곡했고, 옆에는 류옹이 펜으로 쓴 전사(戰史)가 빼곡했다. 그가 처음 손을 짚은 곳은 대구였다. 이어 포물선을 그리며 일본 요코하마를 가리켰다.

“대구 곳곳에서 징집된 수많은 청년이 한 공장에 모였어요. 100명 단위로 묶여 후지산이 보이는 요코하마로 갔어요. 그곳에서 미 7사단 의무부대에 배속된 저는 구호법, 응급치료법, 들것 드는 법, 배 타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그러던 중 류옹은 자신들이 상륙작전에 투입된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미군들이 이야기하는 ‘군산항으로 간다’는 말을 엿들은 것이다. 류옹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 영어가 필요해질 것’이라는 세 살 위 형의 선견지명에 따라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최종 행선지는 인천으로 정해졌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주도로 단행된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이다.

“정신없이 훈련받고 적응이 채 되기 전에 인천행 배에 탔습니다. 의무부대 배는 후방에서 움직였어요. 한미 해병대와 보병부대가 선두로 투입됐죠. 작전은 성공적으로 전개됐고, 저는 생명의 위협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에 성공한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 수도를 탈환했다. 류옹의 부대도 서울로 이동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집중했다. 이후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는 사이 류옹의 부대는 10월 26일 주둔지인 대구로 향했다. 그리고 대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저는 9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어머니가 홀로 아홉 자식을 키우셨죠. 갑자기 제가 사라지니까 두 달 반을 매일 찾아다니셨대요. 저 역시 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했죠. 그러던 어느 날 부대 창문 밖에 흰옷을 입은 여자가 보였어요. 확신도 없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군의관님께 말하고 뛰어갔어요. 네, 어머니가 맞더군요. ‘어머니’ 하고 외치니 처음엔 군복 입고 총을 멘 저를 못 알아보셨어요. 서로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집에서 부대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데, 어떻게 여길 찾아오셨는지…. 그저 기적이었습니다.” 류옹과 어머니의 이야기는 당시 미국 신문에도 보도됐다고 한다.


류영봉 옹이 대구 미군부대 퇴직 당시 부대에서 만들어 준 액자. 코인 등 구성품은 류옹이 각 부대나 지휘관을 만나면서 평생 모은 것들이다,
류영봉 옹이 대구 미군부대 퇴직 당시 부대에서 만들어 준 액자. 코인 등 구성품은 류옹이 각 부대나 지휘관을 만나면서 평생 모은 것들이다,



대구~압록강~부산…다시 전방으로 


고향 대구에서의 군 생활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류옹의 부대가 북진을 지원하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는 검지로 부산을 짚더니 동해로 뻗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이 멈춘 곳은 함경남도 이원이었다.

“11월 1일 배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쭉 올라가 이원항에 도착했어요. 11월 20일, 압록강에 우리가 도착하니까 유엔군과 국군 전우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 줬어요.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중공군이 참전한 사실을요.”

아직까지 중공군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엔군과 국군은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한다. 그러나 아군의 공세를 사전에 예측한 중공군은 장진호와 군우리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유엔군과 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진호는 아주 험악한 곳이었습니다. 중공군 매복 사실을 몰랐던 아군은 그곳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많은 피해를 봤어요. 포위당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어요. 그렇게 약 2주 동안 그곳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죠.”

유엔군은 12월 8일 흥남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미 10군단 전 병력이 흥남항으로 집결해 바닷길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류옹의 부대 역시 흥남에 모였다.

흥남부두를 폭파하는 것까지 보고 남쪽으로 왔다는 류옹은 부산에 도착해 2주간 훈련을 받고 다시 전방에 투입됐다. 이후 가칠봉전투, 화천전투, 김일성고지전투, 철의삼각지대전투, 백마고지전투, 폭찹힐(Pork Chop Hill) 전투 등 끊임없이 전투에 임했다. 정전협정 당일 새벽까지 교전을 벌였다.

“함께 참전한 세 살 위 형이 전사하고, 열두 살 위 형은 크게 다쳤습니다. 가정이 파괴된 셈이죠. 그래서 6·25전쟁을 싫어했어요. 하지만 6·25전쟁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몇 년 전부터 초·중·고등학교에 6·25전쟁 바로 알리기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6·25 참전 당시 류영봉 옹의 모습.
6·25 참전 당시 류영봉 옹의 모습.



미군에 보답 위해 ‘봉사 6000시간’

류옹은 1954년 7월 4일 명예제대했지만 미군과의 인연은 쭉 이어졌다. 대구로 돌아온 류옹이 남은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미군부대에 취직하면서다.

“별다른 기술도 없고, 영어만 잘했어요. 그래서 미군부대 직원 모집 소식을 듣고 응시했는데 합격했죠. 아마 카투사 출신이고, 영어도 잘하니까 선발해 준 것 같습니다.”

그는 1958년 5월부터 2004년 5월까지 46년간 대구 미군부대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정년퇴직했다. 미국 정부는 한미동맹 강화에 일조한 류옹에게 다수의 훈장을 수여했다. 1988년에는 미 육군 의무사령부(MEDCOM)에서 명예훈장을, 1995년에는 미 국무부에서 공로훈장을, 1997년에는 미 국방부에서 민간인 공로훈장을 받았다. 2000년에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감사장을 수여했다.

미군부대 퇴직 후 그는 삶을 되돌아보고, 미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마음에 이를 보답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봉사였다.

미국적십자사 회원인 류옹은 봉사회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18년째 미국적십자사 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 온 봉사시간은 무려 5974시간에 달한다. 이와 관련,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장을 받았다.

6·25 참전 당시 류영봉 옹의 모습.
6·25 참전 당시 류영봉 옹의 모습.



수많은 미군과 우정…잊지 못할 전우도


한평생 미군과 함께한 덕분에 친한 미군 전우도 많다. 2011년에는 6·25전쟁 때 류옹과 전장을 누볐던 미 군의관 에드워드 가이를 SBS 측 도움을 받아 만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류옹이 특히나 그리워하는 전우는 콜 우드 상병이다.

“우드 상병과 상당히 친했어요. 의무병이었던 나와 우드는 인천상륙작전부터 함께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목숨 바쳐 싸워 준 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류옹의 기억에 따르면 우드 상병은 북한군이 압록강으로 진격할 때 전사했다. 류옹은 지난해 우드 상병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아… 나의 미국인 전우 우드 상병(Cpl. Wood)! 불러도 대답 없는 나의 전우! 70년이 지난 아직도 생각나고 잊히지 않는 너의 모습! 씩씩하면서 다정스럽던 너의 모습, 그립고 보고 싶구나! 수만 리 떨어진 미국에서 이름·언어도 다른, 어느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6·25전쟁에 참전하여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한 첫째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이었지. (중략) 나는 한국인으로서 공산화를 막는 것이 의무였지만 나의 전우 우드야, 너는 누굴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니? 너는 오직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였지! (중략) 치열했던 전투에서 나 혼자 살아 나온 것이 나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한미동맹, 더 튼튼해져야” 

한미동맹의 살아 있는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류옹. 그는 앞으로 양국의 우정이 더 끈끈해지길 희망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미동맹이 보다 튼튼해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게 돼 매우 기쁩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쉬움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더 강력해지길 바랍니다. 동맹의 강력함만큼 우리의 자유와 평화도 뒤따를 겁니다.


김해령 기자 < mer0625 >
사진 < 김병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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