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스토니아] ‘소련 지우기’ 청동군인상 이전이 도화선

입력 2021. 01. 15   17:37
업데이트 2021. 02. 0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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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에스토니아: 최초의 대규모 사이버전쟁(2007.4.27~5.18) <상>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 기리는 탈린 해방 기념비
소련군 참전용사 “나치로부터 해방 상징”
민족주의 에스토니아인 “치욕의 역사”
동상 제거에 대해 두 진영 갈려 논쟁 

 
반러·친서방 정치세력의 동상 제거
친러 시민 폭동… 강력 진압에 진정
이후 공공·민간 영역 사이버 공격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은 중세도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구시가지(사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은 중세도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구시가지(사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소련의 통치자 스탈린(Joseph Stalin)의 꼭두각시 정부인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탈린 해방 기념비(Monument to the Liberators of Tallinn)’를 수도 탈린에 세웠다. ‘청동 군인상(Bronze Solider)’으로도 불리는 2m 높이의 이 기념비는 소련군을 상징하는 적군(Red Army)의 군복을 입고 왼손에는 헬멧을 들고 있는 이름 없는 군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약 110만 명의 소련군 동료들을 기리는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청동 군인상이 사상 첫 대규모 사이버 전쟁의 직접적 도화선이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에스토니아의 비참한 역사

북유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는 지리적으로 북쪽과 서쪽으로 발트해, 남쪽은 라트비아, 동쪽은 러시아와 면해 있는 인구 130만 명의 작은 국가이다. 흔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발틱 3국으로 불린다. 그런 에스토니아는 지정학적 이유로 독일 계통의 리보니아로부터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등 주변의 큰 국가들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무엇보다도 1710년부터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그늘 아래 놓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약 200년 동안의 러시아 지배하에서 1917년 잠깐 독립하기도 했지만, 에스토니아의 완전한 독립은 한참 뒤인 1991년 소련의 몰락과 함께 찾아왔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독일, 폴란드 등 지역 강국에 지배를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출처=구글 지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독일, 폴란드 등 지역 강국에 지배를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출처=구글 지도


독립 후, 에스토니아는 과거 그들의 압제자였던 러시아가 아닌 서유럽과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실로 그들은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하게 된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과거의 부활을 꿈꾸는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의 친서방 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해왔다. 또한, 역사와 지리적 이유로 인구 중 4분의 1가량을 구성하고 있던 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들 역시도 국내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의 친서방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청동 군인상의 두 얼굴

첫 대규모 사이버 전쟁은 에스토니아 정부가 2007년 1월 발표한 겉으로 보기에 매우 단순한 국내 정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계획은 차들로 항상 붐비는 수도 탈린 중심부 교차로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청동 군인상을 한적한 수도 외곽의 국립묘지 근처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상은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간의 복잡한 과거 역사와 현재의 외교적 관계를 상징하고 있었다.

에스토니아는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동상의 제거에 대하여 두 진영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양측은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일인 매년 5월 9일을 전후해 이 문제에 대해 더 뜨겁게 대립했다. 소련군 참전용사와 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들에게 동상은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했다.

또한, 그들은 동상을 해방을 위해 격렬한 전투에서 쓰러져간 소련군 동료들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여겼다. 당연히 그들에게 그 동상은 수도 탈린의 중심부에서 매일 만나야 하는 존재였다. 반대로, 보수적인 에스토니아인에게는 치욕과도 같은 역사의 상징물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는 차치하더라도 에스토니아인들은 1940년부터 약 50년간 소련의 지배하에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적군의 군복을 입은 동상은 자신들의 독립을 가로막았던 압제자였다. 동상을 철거하자는 민족주의적인 요구는 2006년 절정에 이르렀다.

2007년 3월 4일 법안 발의

친서방이자 반러시아를 외치는 정치세력이 2007년 3월 4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은 소련 지우기의 첫발로 동상 제거를 위한 법안을 신속하게 발의했다. 에스토니아 정부도 의회의 법안에 보조를 맞춰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동상 제거를 위한 움직임에 당황한 러시아 외교부 제1차관이 4월 3일 에스토니아의 상품과 서비스를 거부하겠다는 언급을 통해 에스토니아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럼에도, 에스토니아 공무원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실제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4월 26일 동상 주변에 펜스를 설치했고, 다음 날 동상과 그 밑에 묻혀 있던 적군의 유해를 탈린 외곽에 위치한 국립묘지로 옮겼다. 친서방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탈린 외곽의 군인묘지로 옮겨진 청동 군인상. 사진=위키피디아
탈린 외곽의 군인묘지로 옮겨진 청동 군인상. 사진=위키피디아


국내외적 반발과 물리적 폭력사태

청동 군인상 이전이 현실화되자마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격렬한 말로 에스토니아 정부의 결정을 비난했다. 러시아 주재 에스토니아의 대사관 직원들이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시민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에 우호적인 많은 에스토니아 시민들은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여 수도 탈린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거리의 상점을 약탈하고, 자동차를 부수었다. 일부 성난 러시아 지지층은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나온 경찰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은 폭동을 강제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시위자를 체포했다. 다행히도 국내적 폭력시위는 금방 진정되었다. 4월 28일 오전이 되자 언제 격렬한 폭동이 있었냐는 듯 거리는 깨끗해졌다.

사이버 공간으로의 전이

그런데 실제적 폭력과 보복 행위는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졌다. 동상이 옮겨진 4월 27일 금요일 밤부터 에스토니아에 대한 알 수 없는 전방위적 대규모 사이버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에스토니아의 공공 및 민간 영역 모두가 공격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당시 인터넷이 어느 국가보다 더 잘 발달되어 있었던 에스토니아에는 치명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정치적 위협과 현실 세계에서 나타난 폭력사태,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일어난 사이버 공격은 절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국가 간의 정치적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 사이버 전쟁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 글쓴이


필자 박동휘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61기로 졸업·임관한 후 연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이어 미국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시애틀 소재)에서 사이버전쟁과 전략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수위했다. 현재는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학과장으로 역사, 전쟁사, 군사전략 등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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