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김다미, 서서히 빠져드는 은근한 반전의 미학
데뷔작서 살인병기 역으로 주목
풋풋한 청춘·여운 긴 워맨스까지
평범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필모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 뒤에
툭 튀어나오는 서늘한 카리스마
겉으로 드러나는 끼보다 강렬한
내면 깊숙이 우러나오는 아우라
“천천히 타세요. 조심히 타세요. 오라이!”
아마도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이라면 이 낯선 광경이 익숙하게 다가올 터. 지금처럼 카드를 대면 ‘틱’ 소리와 함께 결제되는 간편함 따위는 없었지만, 버스안내양이 있어 버스비·회수권을 직접 받고 손님들을 내려 주고 태워 주던 ‘인간적 정’은 있었던 시절의 광경. JTBC 토·일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그 시절 버스안내양 고영례(김다미)와 서종희(신예은)의 우정과 사랑을 담은 드라마다.
그 시작은 100번 버스의 등장과 손님들을 태우고 내리는 버스안내양 영례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친절하지만 앳된 목소리로 “오라이”를 외치는 영례는 버스 안에서 틈틈이 자그마한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영단어를 외운다. 때로 차멀미가 나는 지 눈을 깜박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버스안내양으로서 할 일을 하는 그녀다. “경인은행 앞. 졸다 못 내려도 책임 못 져요!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짧은 장면이지만, 영례라는 인물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차멀미에도 버스안내양으로서 맡은 바 일을 똑 부러지게 하고, 열심히 공부해 무언가 다른 꿈을 좇는 인물이다. 평범함 속에 담긴 비범함. 강렬한 모습으로 비치진 않지만, 서서히 은근하게 다가서는 특별함이 이 인물에서 느껴진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영례와 버스안내양으로 만나 둘도 없는 절친이 된 종희는 그녀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너 진짜 제대로 ‘은또’구나? ‘상또라이’보다 무섭다는 ‘은근 또라이’.”
영례라는 인물의 이 은근하면서도 튀는 캐릭터는 김다미를 만나 더 특별해진 느낌이 든다. 그건 김다미라는 배우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2018년 ‘마녀’라는 영화로 충무로에서 ‘괴물 신인’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던 김다미를 떠올려 보라. ‘마녀’에서 그녀가 맡았던 구자윤이란 인물은 조용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순식간에 냉혹하고 무자비한 초능력 살인병기로 돌변한다. 1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된 김다미는 이 역할에서 특유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 뒤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서늘하고 폭발적인 반전의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평론가들은 물론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녀’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 첫 드라마 데뷔작으로 주연을 맡은 ‘이태원 클라쓰’의 조이서 역할은 어떤가. 천재 소시오패스라는 캐릭터에 딱 맞춤인 연기를 보여 주지 않았나. 차가우면서도 당돌하며 시크한 면모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끌더니 뒤로 갈수록 사랑에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에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겨 줬다. 차갑고 서늘한 면모와 사랑스럽고 순수한 모습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배우의 탄생이었다.
이러한 강렬함만이 김다미라는 배우 전체를 말해 주는 건 아니다. 그 후 최우식과 다시 만나 풋풋한 로맨스 연기를 펼쳐 보였던 ‘그해 우리는’은 보다 평범하고 현실적인 보통의 청춘을 그려 냈다. 여기서도 섬세한 내면 연기로 대사보다 깊은 감정선의 밀도를 만들어 내면서 평범해 보이는 멜로에 깊은 여운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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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소울메이트’에선 자유분방한 인물 안미소 역할을 맡아 고하은(전소니 분)과 인상적인 워맨스를 선보였다. 특히 ‘소울메이트’의 워맨스를 김다미는 단순한 우정 차원이 아닌 ‘사랑의 한 형태’로 그림으로써 청춘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퀴어적 멜로의 정경을 완성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보면 ‘백번의 추억’은 지금껏 김다미가 쌓아 온 다채로운 연기 편린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은근 또라이’ 영례는 김다미 특유의 서서히 빠져들게 하는 반전의 연기 미학을 보여 준다. 평범하고 순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꿈과 당찬 면모가 슬쩍슬쩍 드러날 때 시청자들은 이 인물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보이는 면과 숨겨진 면모의 반전이 만들어 내는 이 매력은 ‘마녀’에서도, ‘이태원 클라쓰’에서도 김다미에게서 발견됐던 것들이다.
또한 1980년대 복고적 시·공간에서 버스안내양이라는 직업을 통해 보여 주는 일상의 모습은 ‘그해 우리는’의 보통 청춘의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백번의 추억’에서 영례는 이른바 ‘K장녀’로 불리는 생활력 강하고 동생들을 챙기는 당대 가난한 가정의 전형적인 소녀가장이지만, 김다미는 여기에 특유의 긍정적이고 낙천적 면모를 더함으로써 신파적인 느낌을 최소화한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종희와의 워맨스다. 이는 다분히 ‘소울메이트’의 워맨스를 상기시키면서도 ‘백번의 추억’만의 복고적이고 순수한 색깔로 변주된다.
그녀의 ‘은근한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겉으로 애써 드러내는 외향적 연기 방식이 아닌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김다미 특유의 연기 접근법에서 비롯된다. 실제 내향적 성격인 김다미는 남다른 캐릭터 이해도를 바탕으로 작품에 임하는 배우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다. 캐릭터 감정에 공감하고, 그 감정 밀도를 충분히 내재화한 뒤 작품에 임한 결과 매력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애써 “나는 매력적”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그 매력적인 면을 밀도 있게 품고 있어 저절로 밖으로 튀어나온다고나 할까. 김다미의 은근함은 그만큼 자연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들 매력이라고 하면 당장 눈에 띄는 ‘끼’에 가까운 무언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진짜 매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면에 쌓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어떤 것이 아닐까. SNS 시대 저마다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자 연출하지만, 진짜 매력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흘러나와 빠져들게 만드는 은근함에 있다는 걸 김다미는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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